1년 내내 초록이 숨쉬는 곳 푸른 바다 없어도 완벽하네

여행의 향기

채지형의 구석구석 아시아 (7) 인도네시아 우붓
발리 우붓 산비탈에 조성된 계단식 논 ‘뜨갈랄랑’. 사진작가들이 즐겨찾는 촬영지기도 하다.
“나중에 어디에 살고 싶어?”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 발리에서 살 거야”라고 답하곤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우붓이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기 때문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산골마을, 우붓. 15년 전 처음 우붓에 발을 디뎠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살아 있다.
마치 작품을 보는 듯한 발리 음식점의 요리
우붓을 생각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고요하고 청명한 우붓은 생각만으로 설렌다. 우붓에는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인도네시아 다른 지역과 달리 발리는 힌두교도가 90%를 차지하는데, 여기에 토속종교까지 섞여 종교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우붓의 매력을 알아차린 유럽 사람들은 우붓에 일찍 둥지를 틀었다. 우붓의 문화는 더 다채롭게 변신했다. 발리 대표 여행지인 꾸따나 사누르에서 볼 수 있는 에메랄드빛 바다는 없지만, 괜찮다. 우붓은 그 자체로 완벽하니까.계단 논과 야자나무 평화로운 우붓

전통의상을 입은 발리 여인
우붓의 매력은 초록에 있다. 파노라마로 펼쳐진 계단식 논도,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야자나무도 모두 초록이다. 바람이 불면 드넓은 논이 춤을 추며 초록의 바다를 보는 것 같다. 산비탈에 조성된 계단식 논도 장관이다. 넓은 땅이 부족한 산골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계단식 논. 뜨갈랄랑에서 벼가 물결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우붓은 여행할 만하다.발리는 열대지역으로, 1년 내내 더워 1년 삼모작이 가능하다. 1년 내내 초록이 숨쉬는 축복받은 땅이다. 푸른 벼는 마음을 다독여주고, 다 자란 후에는 몸을 채워준다. 논을 보고 있노라면 눈과 마음이 모두 초록으로 물들 것만 같다.

우붓에서는 숙소가 중요하다. 편안하고 여유로워야 하니까. 숙소를 선택하는 기준 역시 초록이다. 초록에 푹 파묻힐 수 있는 호텔로 골랐다. 우붓의 장점 중 하나는 주머니가 얇은 여행자도 얼마든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숙소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의 폭도 저렴한 숙소부터 최고급 리조트까지 넓다. 베란다에서 바라본 풍경도, 식당 앞에 펼쳐진 정원도, 수영장 주변도, 복도에서 내려다보이는 길도 모두 싱그러운 초록인 호텔을 골랐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오후 티타임 때 나오는 간식도 초록, 나뭇잎으로 만든 그릇도 초록이었다. 자연만으로 예술이었다.

우붓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야자수 울창한 숲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였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삶의 기쁨 편에서 ‘만족감은 자신이 삶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긴장을 풀고 그 흐름과 함께 움직이는 데서 온다’고 했는데, 호지가 말한 만족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발리의 몽마르트르’ 예술의 향기 물씬

우붓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예술적인 분위기에 있다. 마을 구석구석에 미술관이 있어 ‘발리의 몽마르트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다. 발리는 예부터 사원이나 궁전을 꾸미기 위해, 힌두교 신화나 전설을 나무 위에 그림으로 그렸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발리에 들어오면서 동서양 회화의 영향을 받아 다채로워졌다.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갤러리는 대도시 못지않게 즐비하다. 일부러 갤러리를 들르지 않아도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발리 특유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우붓이다.
발리 우붓의 네까 미술관
여러 갤러리 중 가장 큰 사랑을 받는 곳이 네카박물관이다. 미술품 수집가인 네카가 설립한 미술관으로, 고전 회화부터 미국인 사진가 로버트 에이 코케가 찍은 발리 사진 등 발리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독특한 미술관을 찾는다면, 블랑코 미술관도 좋다. ‘발리의 달리’라고 불리는 스페인 출신 화가 안토니오 블랑코의 개인 미술관으로, 여유로운 분위기가 발리와 잘 어울린다. 안토니오 블랑코는 여성을 신이 만든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며, 여성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발리에서 댄서인 부인을 만나 정착했으며, 독특한 형태의 건물도 직접 디자인했다. 미술관 주변에는 히비스커스 꽃을 비롯해 알록달록한 꽃이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준다. 입구에 있는 색동 옷을 입은 앵무새의 재잘거림도 상쾌하다.

우붓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목공예 마을 마스가 있다. 발리 사람들은 목공예가 악령으로부터 건물을 지켜준다고 믿어, 문틀을 비롯해 집안 곳곳을 장식하곤 했다. 마스의 목공예 주제는 가루다의 태양 새나 추상화된 신, 힌두 서사시에 등장하는 신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원재료의 모습과 성질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고렝에서 바비굴링까지 다양한 전통음식

우붓이 있는 발리는 인도네시아 전통 음식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미식의 섬’으로도 이름이 높다. 우붓에 머물면서 매콤한 삼발소스와 함께 인도네시아 대표 볶음밥인 미고렝부터 돼지 한 마리 빙빙 돌려가며 구워낸 바비굴링까지, 먼저 전통 음식을 섭렵했다.
다양한 과일과 꽃 등을 파는 우붓 전통시장
전통 음식을 맛본 뒤에는 발리 식재료를 창의적으로 해석한 음식을 내는 레스토랑 로커보어를 찾았다. 로커보어는 지역을 뜻하는 ‘로컬’과 먹을거리를 의미하는 ‘보어’를 합한 말로, 식당 이름에 추구하는 바가 들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상상을 깬 음식이 테이블에 차례로 등장했다.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음식을 맛봤지만 로카보어만큼 독특한 코스는 처음이었다. 발리의 식재료를 프랑스식으로 해석한 앙증맞은 음식이 줄줄이 이어졌다. 커피는 발리의 화산 지역인 낀따마니에서, 소금은 발리 북쪽에서, 해산물은 발리 동쪽 바다에서 가져온다고 했다. 식사는 1시간30분 동안 이어졌는데, 밥을 먹었다기보다는 작품을 감상한 기분이었다.

플레이팅도 남달랐다. 인도네시아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이었다. 넓은 접시에 엄지손톱만 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한참 설명했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꽃과 풀만 나와서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지는 코스도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셰프들은 스위스 시계 장인처럼 접시에 고개를 박고 핀셋으로 음식을 담고 있었다. 산골마을의 작은 식당에서 ‘음식은 먹기만 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졌다.

생동감 넘치는 시장과 고즈넉한 왕궁

우붓 중심에는 전통시장과 왕궁이 자리잡고 있다. 우붓 왕궁은 전통 가옥의 전형을 보여준다. 넓지 않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와 아기자기한 연못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끼 낀 건축물은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어 마음을 차분하게 다독여 준다.
울루와뜨 사원에서 일몰 때 펼쳐지는 ‘께짝댄스’
대각선에 있는 전통시장에 가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오늘을 사는 우붓 현지인들이 생생한 목소리로 여행자를 잡아끈다. 형형색색의 인도네시아 의상과 사롱을 비롯해 세밀하게 조각한 목각 제품, 귀여운 고양이 목각 인형 등 탐나는 기념품이 많아 지갑이 열리는 건 순식간이다. 우리나라 여성 여행자에게 특히 인기 있는 품목은 동그란 라탄 가방. 여기저기에서 흥정하는 소리가 실로폰 소리처럼 울린다. 과감한 흥정이 필수다.

아침에 일찍 눈을 뜬다면, 전통시장을 다시 한 번 찾아보자. 낮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새벽부터 이른 아침까지 현지인을 위한 채소 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싱싱한 열대 과일과 채소 등을 볼 수 있다.

우붓에 머물면서 꾸따에서 가까운 울루와뜨 사원으로 ‘여행 중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울루와뜨 사원은 바다의 신 데위 라우를 숭배하는 사원으로, 일몰 때 펼쳐지는 께짝댄스로 유명하다. 께짝댄스는 고대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의 한 대목을 달빛 아래 펼쳐낸다. ‘라마의 기행’이라는 뜻을 가진 라마야나. 고대 그리스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있다면, 인도와 인도네시아에는 산스크리트 문학의 대작인 라마야나가 있다. 께짝댄스에서는 숲속에서 놀던 시타가 악마에게 납치당한 부분부터 라마가 원숭이 도움을 받으며 시타를 구출하는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께짝댄스에서는 흑백 체크무늬 천을 아무렇게나 두르고 웃통을 벗은 남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음의 높낮이와 길이를 조절하며 께짝을 연발한다. 공주 시타 역을 맡은 여배우의 정교한 손동작과 몽롱한 시선에 푹 빠져든다. 절벽에 오롯이 서 있는 울루와뜨 사원. 내용은 알아듣지 못해도 경쾌한 몸짓을 보는 것만으로 신명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우붓에서는 매일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아침마다 신에게 차낭이라는 제물을 바치며 하루의 안녕을 빌었다. 차낭에는 알록달록한 꽃과 향이 들어 있다. 매일 신에게 기도하는 우붓 사람들의 삶이 마음에 와닿았다. 우붓에는 한국에서 보지 못한 꽃도 많았다. 헬리코니아와 에피스시아, 안스리움, 베고니아, 황금새우초까지 새로운 이름을 노트에 또박또
박 적었다.

단조로운 가믈란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걸었다. 발리 사람처럼 음악도 한가하고 평화로웠다. 잠시 어슬렁거렸을 뿐인데, 시간이 어느새 훌쩍 흘러 있다. 우붓에서는 무료하게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어떤 여행보다 더 깊이 그리워질 것 같았다.

우붓=글·사진 채지형 여행작가 travelguru@naver.com여행 정보

대한항공 가루다인도네시아항공이 인천~발리 덴파사르 직항편을 운항한다. 비행시간은 약 7시간. 덴파사르에서 우붓까지는 차로 약 1시간30분 걸린다. 루피아화를 쓴다. 100루피아는 8.26원(2019년 5월 기준).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지만 발리는 힌두교도가 90%를 넘는다. 한국보다 1시간 늦다. 인도네시아는 북서계절풍이 부는 우기(10~3월)와 남동계절풍이 부는 건기(4~9월)로 날씨가 나뉜다. 최저 기온은 약 24도, 최고 기온은 약 31도로 연중 기온 변화는 거의 없다. 건기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꾸따에서는 우버 이용이 편리하지만, 우붓에서는 쉽지 않다. 우붓 안에서 이동할 때는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유명 여행지가 도보로 걸을 만한 거리에 모여 있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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