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만큼 일해서 어떻게 회사 키우나…성장 사다리 사라진다"

주 52시간제 1년 (2) 中企·벤처 성장 가로막는 '유리천장'

내년부터 50인 이상 사업장 적용
“지금도 연구원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데 일하는 시간까지 줄이라니 암담하네요.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되면 우리 같은 바이오업체들은 경쟁력에 큰 타격을 받을 겁니다.”

면역항암제 개발업체인 유틸렉스의 권병세 대표는 주 52시간 근로제를 앞두고 걱정이 많다. 유틸렉스 임직원은 80여 명으로 내년부터 근로시간 단축 대상에 포함된다. 권 대표는 “지금 생각으로는 사람을 더 뽑더라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운영하는 연구개발(R&D)법인을 통해서 진행할 계획”이라며 “거기서는 연구원들이 근로시간 제약 없이 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이오업체 셀리버리의 직원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이 업체도 내년부터 주 52시간 근로제를 적용받는다. /셀리버리 제공
대통령한테까지 직접 불만 토로

주 52시간 근로제가 내년부터 50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되면서 벤처·중소기업인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근근이 버텨온 한계기업들을 나락으로 밀어버릴 것이라는 걱정도 많지만 무엇보다 ‘사다리를 걷어차였다’는 분노가 커지고 있다.

벤처기업 관계자는 “작은 기업이 큰 회사로 성장할 유일한 길은 발 빠르게 기회를 찾아서 큰 회사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라며 “작은 기업에 대기업만큼만 일하라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작은 기업으로 남으라는 것처럼 들린다”고 꼬집었다.

판교벤처밸리의 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인사담당자는 “스타트업은 얼마나 빠르게 ‘압축 성장’하는가에 사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며 “주 52시간 근로제의 확대 시행은 ‘스타트업들의 점프’를 가로막는 유리천장이 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중소기업인들은 이런 우려를 대통령 앞에서도 대놓고 얘기했다. 모바일 금융서비스 토스로 유명한 비바리퍼블리카의 이승건 대표는 지난 2월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주 52시간 근로제의 취지는 알겠지만 급격히 성장하는 기업에 이것은 또 하나의 규제”라고 토로했다.
“어쨌든 인력을 더 뽑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냐”는 일부 지적에 벤처기업인들은 “사정을 모르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바이오헬스산업 등에서 특히 그렇다. 구인난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국바이오협회에 따르면 직종별 인원 충족률은 연구직 81.6%, 개발직 77.2%, 생산·시설직 87.5%, 영업·관리직 86.4% 등에 그친다. 바이오헬스업계만 놓고 보더라도 2만 명 정도가 모자라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바이오 관련 스타트업 관계자는 “대기업이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비하기 위해 일 좀 한다는 직원들을 데려가고 있다”며 “추가 인력을 채용하기 어려워 연구개발 일정에도 차질을 빚고 있다”고 털어놨다.

일부 벤처기업은 직원을 근로시간 단축 대상에서 제외되는 임원으로 승진시키는 ‘꼼수’마저 부리고 있다.뿌리기업들 “납기 경쟁력 약화”

뿌리기업도 근로시간 단축에 한숨을 내쉬고 있다. 뿌리기업이란 주물, 금형, 도금 등 제조업의 바탕이 되는 공정 기술로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다. 선박엔진 부품인 실린더라이너를 생산하는 광희는 뿌리기업으로는 요즘 드물게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조영삼 광희 대표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다. 광희의 직원은 40명 정도로 당장 내년은 괜찮지만 2020년 7월이면 주 52시간 근로제를 적용받는다. 조 대표는 “주문이 밀려 사람을 더 쓰고 싶어도 주물공장에서 일하려는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며 “지금도 주문의 30% 정도는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희 직원들은 토요일 특근을 포함해 평균 주 65시간씩 일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이 뿌리기업의 가격 경쟁력은 물론 납품 경쟁력까지 떨어뜨릴 것으로 걱정하고 있다. 안산 반월도금단지에서 20년간 도금공장을 운영한 한 기업인은 “한국 도금업체들은 인건비 경쟁에서 중국 베트남 등 신흥국에 밀린 지 오래”라며 “그나마 남아있는 납기 경쟁력마저 떨어지면 끝장”이라고 말했다.

나수지/임유/김남영 기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