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영웅들 기적 뒤엔 제갈용의 '원팀 리더십' 있었다

U-20 남자 축구 대표팀,
FIFA 주관대회 첫 결승행
20세 이하(U-20)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12일(한국시간) 폴란드 루블린의 루블린경기장에서 열린 2019 폴란드 FIFA U-20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에콰도르를 1-0으로 제압한 뒤 경기장에 앉아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정용호(號)’가 한국 축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20세 이하(U-20)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 결승에 오르는 전대미문의 드라마다. 대한민국의 새벽이 뒤집어졌다.

정정용 감독(50)이 이끄는 20세 이하 대표팀은 12일(한국시간) 폴란드 루블린의 루블린경기장에서 열린 2019 폴란드 FIFA U-20 월드컵 준결승에서 에콰도르를 1-0으로 꺾고 결승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우리나라가 1948년 FIFA에 가입한 이래 FIFA 주관 대회 결승에 진출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경기 상황에 따라 전형과 선수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정 감독의 ‘팔색조 전술’과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팀 문화를 토대로 한 ‘즐기는 축구’가 상승작용(시너지)을 일으켰다는 분석이 나온다.덕장(德將):칭찬으로 춤춘 리틀 태극전사

정정용 감독
12일 새벽 5시20분. U-20 월드컵 결승행이 확정된 직후 대표팀 선수들은 정 감독에게 달려가 팀 동료나 친구를 대하듯 생수를 부어가며 기쁨을 만끽했다. 정 감독은 대표팀 감독으로서 권위를 내려놓고 선수들과 뒤엉켜 기쁨을 나눴다. 감독과 선수 간 수평적 문화를 이끈 정 감독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명장면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정 감독은 진작부터 덕장(德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번 대회 내내 8강, 4강, 결승 등 목표를 정하는 대신 “선수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싶다”고만 했다. 성적에 대해 압박을 주기보다 경기마다 선수들이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초점을 뒀다. 과거 국내 축구 지도자들이 인색했던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놀이’처럼 웃고 떠드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즐기는 축구’를 가능하게 한 배경이다.

결승행에 도움을 준 대표팀 막내 이강인(발렌시아)이 다소 서툰 한국말로 동료들에게 “페널티 킥을 내가 차겠다”, “애국가를 크게 불러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것도 정 감독 체제의 수평적 분위기였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4강전을 마친 뒤 이강인은 “여기까지 오는 데 감독님이 정말 선수들을 많이 배려해줬다”며 “절대 못 잊을 감독님이자 완벽한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지장(智將):경기 상황 따라 유연한 전술정 감독은 조용하다. 생각하고 기다리며 결단한다. 그 결과물은 때론 수비적이고, 때론 공격적이다. 상황에 따라 전형을 바꾸는 ‘팔색조 전술’이다. 그에게 ‘제갈용’(제갈공명+정정용)이란 꼬리표가 붙은 까닭이다. 이 유연함은 대회 내내 축구계와 축구팬들을 여러 번 놀라게 했다.

세네갈·일본과 치른 경기가 대표적이다. 8강 세네갈전에서 정 감독은 대표팀이 1-2로 끌려가던 후반 35분 수비수 이재익(강원)을 빼고 발 빠른 공격수 엄원상(광주)을 투입해 공격을 강화했다. 일본과의 16강전에서 쓴 전략의 업데이트 버전이다. 엄원상을 투입한 건 같았다. 하지만 이지솔(대전)을 또 뺄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이재익을 뺐다. 4강전을 앞두고는 선발 라인업에 변화를 줬다. 출전 시간이 짧았던 ‘비주전’ 김세윤(대전)과 고재현(대구)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발 투입했다. 덕분에 힘을 아낀 이강인은 전반 39분 재치있는 ‘택배 프리킥’을 밀어넣어 최준의 결승골을 이끌어냈다. 이후 후반 27분 이강인을 빼고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 박태준(성남FC)을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승리를 지켜내는 동시에 결승을 대비해 ‘킬러자원’의 휴식을 꾀한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마이너의 반란’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전반전에는 수비에 집중한 스리백 전형(양쪽 측면 미드필더의 수비 가담 시 최종 수비수 5명)으로 상대 공격을 막아낸다. 후반전엔 발 빠른 공격수 투입과 함께 포백 전형(최종 수비수 4명)으로 바꿔 반전을 이뤄낸다. 한국이 이번 대회 터뜨린 8골 가운데 6골이 후반(연장전 포함)에 나왔다. 정 감독은 “상대의 실력이 우리와 비슷하거나 좋다고 판단될 때는 여러 가지 전략, 전술이 있어야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정 감독이지만 축구계에서는 ‘흙수저’로 통한다. 경일대를 나와 실업팀 이랜드 푸마 등에서 뛴 그는 현역 시절 연령별 국가대표 경력이 없다. 프로 무대도 밟아보지 못했다. 부상 등 여파로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는 2006년부터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로 활동하며 유소년 육성에 집중했다. 꿈나무들이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소프트 리더십’이 잉태된 배경이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정 감독은 현 20세 이하 대표팀 선수들이 18세일 때부터 3년간 지도했다”며 “선수 특성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어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타이밍에 투입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