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침묵은 영혼의 언어…유럽 수도원의 영성을 찾아서

묵상

승효상 지음 / 돌베개
520쪽 / 2만8000원
그리스 북부 칼람바카 지역 메테오라에 있는 발람수도원. 직벽의 바위 봉우리 위에 수도원을 세웠다. /돌베개 제공
경북 상주의 산속에 있는 카르투시오수도원에 간 적이 있다. 봉쇄수도원인 이곳의 수도자들은 하루 세 번 미사와 기도를 위해 경내 성당에 가는 것 외에는 모든 시간을 독립된 방에서 홀로 지낸다. 제대로 갖춘 식사라고는 조그만 창구를 통해 들어오는 점심 한 끼뿐이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수행하는 불교의 무문관(無門關)이나 다름없다. 오로지 기도와 독거(獨居), 침묵과 고독의 시간뿐이다.

외진 산골에서 왜 이렇게 사는지 물었더니 수도 생활이 50년을 넘는 수도원장 신부가 말했다. “고독이라는 여건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고독 속에서 행복하다”고 했다. 수도원은 이를 위해 건물 구조부터 ‘고독한 형태’로 만들었다. 성당과 회의실, 작업실 등 공용 공간 외에 수도자마다 독립된 은수처(隱修處)를 갖도록 해 놓았다.해발 1300m의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프랑스의 그랑드 샤르트뢰즈수도원도 마찬가지다. 11세기 브루노 성인이 창립한 카르투시오수도회의 본원인 이곳 수도자들의 고독한 수도생활은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을 통해 공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9년 이 영화의 국내 시사회 때 해설을 맡은 이는 뜻밖에도 건축가 승효상 씨(67·국가건축정책위원장)였다. 그는 “수도사들의 침묵은 바로 그들 영혼이 건네는 언어였고, 그들이 기거하는 공간의 형식은 그들 영혼의 존재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평소 묘역과 종교건축물을 자주 답사하며 영성이 담긴 건축을 지향해온 그가 유럽 수도원 순례기 《묵상》을 내놨다.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어디에 가면 뭐가 있다는 식의 단순한 여행기는 아니다. ‘동숭학당’이라는 공부 모임에 참가한 이들과 함께 지난해 이탈리아, 프랑스 일대 수도원과 성당을 두루 답사한 기록이자 인문 해설서이며, 자기 고백을 담은 수상록이다.로마 근교 수비아코의 베네딕토수도원에서 출발한 여정은 프랑스 파리까지 2500㎞에 달했다. 미술가, 디자이너, 목사, 변호사 등 각계 인사 20여 명이 동행했고, 저자가 이전에 방한한 그리스, 아일랜드, 티베트 등을 포함해 30여 개 도시, 50여 곳의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가 ‘진실의 건축’이라고 예찬했던 프랑스 프로방스의 르 토로네 수도원과 여기서 영감을 받아 건축한 리옹의 라 투레트 수도원, 그가 현대건축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롱샹 성당, 영화 ‘위대한 침묵’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스스로를 닫힌 공간에 가둔 채 기도와 묵상으로 평생을 보내는 봉쇄수도원 체르토사 델 갈루초, 중세 최대의 수도원이었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은 클뤼니 수도원…. 로마의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 13세기 성 프란체스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레 성당 내부의 프로치운쿨라 예배당,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루카의 두오모인 산 마르티노 성당에도 들른다.

여정의 군데군데에서 팁처럼, 강의처럼 전해주는 수도회와 교회의 역사와 문화, 건축에 담긴 시대정신, 저자의 신앙고백 같은 생각들이 공감을 자아낸다. 본격적인 여정에 앞서 방문한 로마 근교 수비아코의 베네딕토 수도원은 아슬아슬한 산벼랑에 자리해 있다. 성 베네딕토는 왜 1500년 전 이 험하고 외진 곳을 수도처로 삼았을까. 저자는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일 거라고 말한다.전 세계 모든 수도회가 따르는 베네딕토 수도 규칙서가 제시하는 삶의 세 가지 기준은 복음 삼덕(三德)으로 불리는 청빈과 정결(동정), 순종이다. 그중에서도 순종이 가장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순종은 완전히 자신을 버려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베네딕토 규칙서가 ‘기도하고 노동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중앙의 정원을 중심으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수도원 건축의 기본 양식, 예수와 아버지 요셉은 목수가 아니라 집을 짓는 건축가였다는 사실, 우리말로는 같은 수도원이라도 봉쇄수도원은 ‘모나스터리’, 여러 명의 수도자들이 모여 생활하는 공주(共住)수도원은 ‘클로이스터’라는 구분, 수도자가 급감해서 숙박시설로 전용 또는 겸용하는 수도원이 많아서 조용하고 싸게 여행하기 좋다는 등의 깨알 같은 팁도 유용하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소도시 루카에 있는 산 마르티노 성당 출입구에는 바닥에 짙은 색 돌로 미로를 만들어놨다. 성당에 들어가려면 동심원 모양의 미로를 무릎 꿇고 기어서 가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티베트 라싸의 조캉사원에서 만난 오체투지의 풍경을 떠올린다. 옷은 남루하고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서 피어나는 광채…. 수도란 그야말로 길을 닦는 것이며, 염화시중의 미소는 온몸으로 길을 닦는 고통을 겪은 뒤에야 알게 되는 행복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수도원, 건축, 여행, 저자 자신 등 4개의 층위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흑백 사진과 어우러지면서 순례에 동참한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