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권의 호모글로벌리스 (22)] 글로벌 시대의 사과Ⅱ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
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대처방식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과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자신의 체면과 위신이 깎인다고 생각한다. 둘째, 사과는 책임을 수반한다. 마지막으로 지위와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사과하기를 주저한다.

사과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첫째, 잘못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사과의 핵심은 “미안하다”가 아니라 “내가 잘못했다”이다. 깨끗하게 인정하고 수용한다면 상대방의 공격을 둔화시키고 강점으로 승화할 수도 있다.2014년 2월 7일 개최된 소치동계올림픽 개막식. 올림픽 오륜을 상징해 제작한 눈꽃송이 형상이 하나씩 펴지며 오륜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오른쪽 끝의 눈꽃이 펴지지 않아 사륜기가 되고 말았다. 러시아는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됐고 조롱을 받았다. 러시아 올림픽위원회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폐막식 때 댄서들이 오륜마크를 춤으로 표현하던 중 오륜 가운데 한 원을 완벽하게 펼쳐 보이지 않았다. 개회식에서의 해프닝을 일부러 재현한 것이다. 대중은 웃으면서 환호했고 사륜에 관한 트윗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수용하자 오히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잘못 인정하고 수용해야둘째, 알맞은 때와 장소를 가려 사과해야 한다. 특히 타이밍이 중요하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에게 사과할 때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상황에 맞게 사과의 형식과 내용을 조정할 필요도 있다. 영국의 신문 경영자이자 정치가인 비버브룩이 런던의 클럽 화장실에서 에드워드 히스 하원의원(후에 영국 총리를 지냄)을 만났다. 비버브룩은 당황했다. 며칠 전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에 히스 의원에 대한 모욕적인 사설을 실었기 때문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틀렸소. 이곳에서 지금 사과하오.” 이 말을 들은 히스 의원이 일갈했다. “좋아요. 그러나 다음엔 모욕은 화장실에서 주고 사과는 당신 신문에서 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저녁식사 초대에 늦게 도착했다고 가정하자. 이때는 장황한 변명보다 간단하게 ‘소리(sorry)’라고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필자가 베푼 만찬에 한 유럽 대사가 30분 이상 늦게 도착했다. 시간을 잘 지키는 유럽 문화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도착 후 그 대사가 말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이 나라 교통부 장관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일행은 웃음을 터뜨렸고 저녁식사는 즐겁게 이어졌다.

셋째,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어떤 잘못을 어떻게 저질렀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피해자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사과여야 한다. ‘그러나’ ‘하지만’ 등 토를 다는 것은 변명하는 것으로 비쳐 진정성을 훼손한다.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추모비에서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의 용기 있는 행동은 국제사회에서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진정성 있는 사죄와 화해의 상징이 됐다. 협상장에서 감정이 격해진 한 외교관이 외쳤다. “지옥에나 가라.” 상대방이 사과할 것을 요청하자 그는 말했다. “지옥에 가지 마시오.” 진정성이 결여된 사과다.변화를 위한 약속도 중요

넷째, 변화를 위한 약속이 포함돼야 한다. 사죄는 피해 보상이 포함될 때 효과가 있다. 변화를 위한 약속은 ‘미래의 나’를 ‘과거의 나’로부터 격리, 회복시킨다.

스페인은 1492년 무슬림 지배를 종식하고 국토를 통일하면서 ‘알람브라 칙령’을 선포했다. 칙령에 따라 유대인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4개월 내에 스페인에서 떠나야 했다. 이에 따라 당시 22만 명의 유대인 중 15만 명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강제 추방당했다. 500여 년이 지난 2015년 스페인 의회는 세파르디(1492년 추방당한 유대인의 후손)에게 스페인 국적을 부여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스페인계 세파르디는 거주지, 종교 등과 무관하게 이전 국적을 유지하면서 스페인 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세파르디는 세계에 350만 명 정도 살고 있다. 이 법에 따라 현재까지 6500명 이상이 스페인 국적을 취득했다. 이 법은 ‘스페인 역사상 가장 큰 과오’를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진정한 역사적 사과의 예로 기록될 것이다.다섯째, 사과의 말과 함께 행동을 덧붙인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예컨대 손편지나 꽃다발을 보내는 것이다.

사과 요청을 받았으나 오히려 사과를 받아낸 경우를 보자. 링컨의 변호사로 일하던 사람의 조카딸이 링컨 집에서 일하게 됐는데 며칠 만에 링컨의 아내와 싸움을 하고 뛰쳐나갔다. 그날 오후 링컨의 아내는 조카딸의 짐을 가지러 집에 온 변호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격앙된 변호사는 링컨의 사무실로 달려가 부인이 사과하지 않으면 참지 않겠다고 말했다. 링컨은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안타깝게 생각하오. 하지만 제가 15년 동안 매일 겪어온 것을 잠시만 참아주면 안 되겠소?” 변호사는 링컨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