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바흐의 삶처럼, 흐르는 시냇물처럼

한국합창단 첫 바흐페스티벌 초청 공연
서울모테트합창단의 순수음악 꾸준하길

이경재 <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
요즘도 그렇게 교육을 받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것 중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음악의 아버지’는 바흐, ‘음악의 어머니’는 헨델이라는 것이다. 헨델은 남자인데 왜 어머니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두 명 다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 바로크시대의 유명한 음악가는 바흐, 헨델 외에도 많지만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인지 이 두 명의 작곡가가 음악의 기원인 듯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해 독일에서 태어난 두 작곡가는 음악을 추구하는 스타일이 대조적이었다.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경향을 따라 많은 오페라 작품을 작곡하며 대중에게 다가갔고, 바흐는 주로 교회음악을 쓰며 헨델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렸다. 자연스럽게 둘의 생활 무대도 달랐다. 헨델은 오페라 공연이 활발했던 영국으로 향했다. 바흐는 독일 중소도시 아른슈타트, 바이마르, 쾨텐, 라이프치히로 옮겨 다니며 음악의 폭을 넓혀갔다. 당시 확립되던 대위법(두 개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기법)을 잘 활용한 대가였고, 평균율(옥타브 사이에 음정을 실용적으로 균등하게 나눈 것)을 이용한 곡을 작곡하며 조성 간 이동을 객관화하는 데 기여했다.바흐는 조강지처와 사별한 이후 재혼한 부인에게서 20명의 자녀를 뒀는데 대부분 아버지처럼 음악의 길을 걸었다. 이 때문에 후대에 바흐를 칭할 때 아버지 바흐가 아니라 자녀들을 칭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바흐라는 이름은 어원상 ‘시냇물’을 뜻한다. 바흐는 때로는 굽이치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하게 흐르던 삶 속에서 꾸준하게 음악 작업을 이어갔다. 지금은 ‘음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지만 당시엔 그리 주목받는 음악가가 아니었다. 영주로부터 급여를 받으며 그 도시의 교회를 위해 음악을 창작하는 음악가 정도였다. 후기는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고전시대의 문이 열리는 시기라 그의 음악은 오히려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그렇게 바흐는 타계 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지만, 1800년대 초반 그의 음악을 재발견한 한 음악학자에 의해 재조명됐다. 또 낭만시대 작곡가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다시 소개하며 음악사에 확실히 각인될 수 있었다.

바흐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도시인 라이프치히는 1904년부터 바흐를 기리는 음악축제 ‘바흐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매년 6월 10여 일의 축제 기간에 도시 곳곳에서 100회 넘는 음악회가 이어진다. 한국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서울모테트합창단이 초청받아 이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국내 유일의 민간 직업 합창단인 서울모테트합창단은 재정과 환경이 어려운데도 30년 넘게 바흐 음악을 비롯한 종교음악과 합창음악을 선보이며 시냇물처럼 순수음악의 자리를 지켰다. 그런 모습은 바흐의 삶과도 닮아 있다. 라이프치히 바흐연구회 초청을 받아 현지에서 국내 음악의 위상을 높였다고 하니 음악인으로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서부터 흘러오는지 모르는 시냇물은 주변의 수목을 푸르게 하고 습도와 온도를 조절해준다. 삶이 굽이치고 등락을 거듭해도 시냇물처럼 계속 나아가면 선한 영향을 나눌 수 있다. 라이프치히의 바흐페스티벌 현장에서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바흐와 서울모테트합창단의 음악에 찬사를 보낸다. 앞으로도 꾸준히 흐를 그들의 음악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