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에서 느긋하게 걷고, 듣고,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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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전시돼 있는 장소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궁전을 찾는 나라별 관광객 1위는 한국이다. 1441개의 방을 가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 쇤부른궁전 방문객 순위에도 6위에 올랐다. 사실 한국 관광객들이 예술의 도시 빈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다. 평균 하루 남짓이다. 그래서 이동하기 바쁘다. 체코와 헝가리를 도는 동유럽 일정에 끼워넣기도 하고 독일과 프랑스를 가는 길에 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키스’ 앞에서 사진을 찍고 쇤부른궁 정원을 둘러봤다고 빈을 ‘여행’했다곤 할 수 없다. 빈은 그렇게 스쳐 지나기엔 아까운 도시다. 나흘간 빈에만 머물며 느낀 이 도시의 매력은 ‘여유’와 ‘공존’에 있다. 도시와 자연이 어우러지고 과거와 현재는 연결돼 있다. 전통에 미래를 담았고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마저 느긋한 도시의 일부가 된다. 2010~2018년 9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머서 발표)라는 타이틀을 가진 빈에서의 일상이 궁금했다.
오스트리아 빈
빈의 구도심 한 바퀴…슈테판 성당·오페라하우스엔 낭만이 흐른다
매일 바뀌는 오페라하우스 무대빈은 걷기 좋은 도시다. 트램이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도 잘 돼 있지만 구도심은 볼거리 먹거리가 가득해서다. 우뚝 솟은 슈테판 성당을 중심으로 빈 구도심을 둥글게 두른 링 거리(Ringstrasse) 안팎을 걷다 보면 바이올린과 아코디언뿐 아니라 하프와 클라리넷 거리 연주까지 즐길 수 있다. ‘빈에 왔으니 세계적인 공연장 오페라하우스나 뮤직베레인, 콘체르트하우스 같은 곳에서 공연은 한번 봐야지’ 했지만 미리 프로그램을 봐두지 않은 탓에 예약은 쉽지 않았다. 스탠딩석은 구할 수는 있었지만 현장에 2~3시간 전에 가서 기다려야 하고 2시간 가까운 공연을 서서 볼 자신은 없어 포기했다.아쉬운 마음에 오후 2시에 있는 백스테이지 투어를 신청했다. 영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와 일본어 등 6개 언어로 진행하는 백스테이지 투어는 하루 1000명 이상이 신청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중앙계단부터 따라 올라가면 올해 개관 150주년을 맞은 오페라하우스 곳곳을 살펴볼 수 있다. 가장 흥미로운 건 당일 공연 세팅 작업이 한창인 무대 뒤편이었다. 오페라하우스는 한 공연을 2~3일씩 하는 경우가 없다. 9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한 시즌 동안 오페라와 발레 등 매일 다른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그래서 무대를 매일 다시 꾸미고 바꿔야 한다. 투어 중 그 작업이 한창이었다. 100명 정도의 작업자가 무대 장치와 조명 등을 손보고 배경 그림판을 바꾸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투어 가이드는 “공연자들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다양한 무대를 선보일 수 있도록 매일 다른 공연을 올리는 것”이라며 “기본적인 공연 계획의 틀은 4년치 정도를 미리 짜둔다”고 설명했다.
백스테이지 투어 후 주변에 있는 모차르트의 화려한 결혼식과 초라한 장례식이 치러진 성 슈테판 성당과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한 곳인 미술사 박물관 등을 둘러본 뒤 다시 오페라하우스로 돌아왔다. 저녁 7시부터 시작하는 공연을 야외에서 실황 중계로 보기 위해서다. 10분 전에 도착했더니 이미 마련해 놓은 의자는 빈자리가 없었다. 의자 대신 앞쪽 바닥에 앉은 사람들 틈에 끼었다. 이날 무대에 올려진 공연은 1800년대 파리에서 초연된 발레 ‘해적(Le Corsaire)’이었다. 야외라 조금 산만하고 카메라를 통한 간접 관람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대형 스크린 아래로 간간이 오가는 사람들마저 공연의 일부 같은, 색다른 묘미가 있었다.저녁식사는 길 건너편 가판대에서 산 핫도그로 대신했다. 커다란 빵에 소시지를 꽂아 넣은 간단한 구성이지만 고소한 빵의 풍미와 고기의 짭조름한 맛이 잘 어울렸다. 4~6월, 그리고 9월엔 50㎡ 크기의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도 등장한 오페라하우스의 멋진 야경은 덤이다. 오페라하우스의 스크린 실황 공연을 감상하고 싶다면 간단한 먹거리와 깔고 앉을 종이, 얇은 덧옷도 챙겨가는 게 좋겠다.
클래식 공연뿐 아니라 빈에선 매년 6월 말~7월 초에 국제 재즈음악 축제가 열린다. 1991년 시작된 세계 최대 재즈 페스티벌 중 하나다. 6월엔 팝, 재즈와 일렉트로닉 뮤직을 즐길 수 있는 유럽 최대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 ‘다뉴브 아일랜드 페스티벌’도 열린다.
커피는 음료가 아니라 문화검색창에 ‘비엔나’를 치면 ‘소시지’와 함께 위쪽에 뜨는 연관 검색어는 ‘커피’다. 빈의 카페에 가서야 비로소 알았다. 빈에서 커피는 음료가 아니라 문화라는 것을.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부터 내려온 비엔나의 커피 문화는 201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도 등재됐다. 빈 곳곳엔 카페가 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커피를 마실 뿐 아니라 신문을 보고 대화한다. 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했고 토론을 하면서 식사도 한다. 주말이면 많은 시민은 카페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즐긴다. 그래서인지 빈 카페엔 반드시 한쪽에 신문과 잡지들을 모아놓은 게 눈길을 끈다. 1876년 문을 열어 학자, 작가들의 아지트로 불렸던 카페 센트럴엔 매일 22개 언어권의 신문 250부가 비치돼 있었다 한다.빈의 구도심 거리를 걷다보면 1800년대부터 영업해왔다는 카페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1891’이란 숫자가 간판에 찍혀 있는 카페 슬루카(SLUKA)도 그중 한 곳이다. 입구는 좁아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길게 이어진 매장 내부가 꽤 넓다. 각각 4유로 남짓이면 빈의 대표적인 커피 멜랑지(Melange)와 아인슈페너(Einspanner)를 마실 수 있다. 색색으로 예쁘게 장식된 조각 케이크도 한입 먹어보지 않을 수 없다. 따뜻한 커피에 달콤한 케이크를 마주하고 앉으면 여유롭게 하루를 음미하는 현지인의 일상을 맛볼 수 있다.
통상 ‘비엔나 커피’로 불리는 멜랑지는 에스프레소에 우유거품을 올려 카푸치노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커피다. 마차를 끄는 마부라는 의미에서 나온 아인슈페너는 그들이 추위와 피곤을 풀기 위해 마차 위에서 마시던 커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피로를 풀기 위해 진한 카페인을 섭취하면서 그 위에 생크림과 설탕을 잔뜩 올려 식사 대용으로 배도 채우는 한 잔이었다.
비엔나의 커피 문화를 접해보려면 황실에 디저트를 납품하는 곳이었던 ‘더멜’이나 ‘자허 토르테’라는 초콜릿 케이크로 유명한 ‘카페 자허’를 들러보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단골 카페로 알려진 ‘란트만(Landmann)’이나 구스타프 클림트가 자주 갔다는 ‘카페 무제움(Cafe Museum)’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이렇게 유명한 카페들은 오후 시간에 가면 줄을 서거나 번호표를 받아야 할 정도로 대기 시간이 길 수 있다.
도시에서 키우는 벌
빈에서 가장 유명 건축물 중 하나인 쿤스트 하우스(Kunst Haus Wien)는 구도심에서 트램을 타고 15분 정도면 찾아갈 수 있다. 쿤스트 하우스는 오스트리아의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1928~2000년)의 뮤지엄이다. 자연주의 철학을 갖고 있었던 그는 모든 공간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다. 사람과 자연은 하나고 사람이 자연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남긴 건물 틈으로 나무가 삐죽하게 나와 있고 내부 바닥은 굴곡져 있다. 자연엔 직선이 없고 인간은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야 함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더 흥미로운 건 쿤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키우고 있는 벌이다. 쿤스트 하우스의 제일 위층은 훈데르트바서가 작업하면서 머물던 공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거실 옆 창으로 나가면 옥상에 마음대로 자라난 풀과 한쪽 구석에 놓여진 벌통을 볼 수 있다. 한걸음 다가가자 150개의 벌집에 살고 있는 2억 마리의 꿀벌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양봉가 토마스 젤렌카는 “예전엔 여기서 소를 키웠지만 2~3년 전부터 꿀벌을 키우기 시작했다”며 “여기 옥상에만 360여 종의 식물이 살아 자연적으로 벌들이 모여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방식으로 양봉을 하는 곳이 빈에만 2000여 곳에 이른다. 오페라하우스, 미술사박물관 같은 명소의 옥상에서도 벌집을 발견할 수 있다.
쿤스트 하우스에서 훈데르트바서의 일생을 따라가며 그의 작품을 감상한 뒤 5분 정도 걸어서 이동하면 그의 철학이 묻어나는 또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훈데르트바서가 시의 의뢰를 받아 건축 디자인에 참여한 영구임대주택이다. 1980년대에 지은 건물엔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그곳의 창문은 크기와 모양이 하나도 같은 게 없었다. 알록달록한 기둥과 벽면에 곳곳의 나무들로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용한 주택가였지만 이 영구임대주택 주변만 관광객들로 붐볐다. 빈 도심 한가운데, 자연과 어우러진 생활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 예술가의 힘이었다.
와인을 생산하는 세계 유일 수도
빈에서 재배한 포도로 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와인을 마시기 위해 마지막날 저녁은 살짝 외곽으로 나갔다. 빈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만 이동하면 푸른 포도밭 언덕을 가진 와이너리를 볼 수 있다. 빈 시내의 절반가량은 정원, 공원, 숲, 농지 등 녹색지대다. 그중 일부가 와이너리다. 빈은 세계에서 와이너리가 있는 유일한 수도이기도 하다. 2세기께 로마군이 주둔하면서 포도밭 경작을 시작했으니 그 역사가 길다. 빈 시내 포도밭 규모는 6.6㎢에 이른다. 대부분인 80%가 화이트 와인 품종이다.150여 곳에 달하는 빈 와이너리 중 두 번째로 큰 곳 ‘푸어가슬-후버(Fuhrgassl-Huber)’를 찾았다. 와인을 파는 ‘호이리게(Heurige)’를 함께 운영했다. 호이리게는 원래 ‘보졸레 누보’처럼 ‘그해 빚은 새 포도주’를 의미하는데 이를 음식과 함께 파는 곳도 지칭한다. 뒤편에 드넓은 와이너리를 가진 호이리게로 들어서는데 입구에 솔가지가 걸려 있다. 그것이 ‘햇 와인을 팔고 있다’는 표시라 한다. 마침 주말이어서 아이들과 함께 찾은 가족과 결혼식 피로연을 위해 찾은 단체 손님들로 가게 안은 북적였다. 야외 테이블과 실내 자리를 선택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을 땐 야외에 앉아 가게 뒤편 포도밭을 배경으로 여유롭게 잔을 부딪치기 좋아 보였다. 실내는 고소한 음식 냄새와 기분 좋은 떠들썩함으로 펍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와인 종류에 따라 10유로가량을 내고 테이스팅도 할 수 있다. 상큼한 첫맛으로 인기가 많은 ‘그뤼너 벨트리너(Gruner Veltliner)’도 한 병에 6.5유로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 이곳의 와인 메이커 율리안 바이서는 “이곳에서는 1년에 25만 병가량을 생산하는데 대부분 5~6가지 포도 품종을 섞어서 만든다”며 “빈 와인 조합에서의 철저한 검사로 품질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술을 파는 곳이어서 술은 테이블로 와서 주문받지만 슈니첼아니 소시지, 족발과 튀김 요리 등 안주는 직접 카운터 쪽으로 가서 주문해야 한다. 화이트 와인 덕에 기름기 있는 음식들도 느끼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와인과 함께하는 기분 좋은 저녁식사는 더디게 지는 초여름의 해처럼 긴 여운으로 남았다.
빈(오스트리아)=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
여행 정보
대한항공은 빈으로 향하는 직항을 운행하고 있다. 11시간20분가량 걸린다. 경유편은 에어프랑스, 루프트한자, 네덜란드항공, 폴란드항공 등 다양한 유럽 항공사를 활용할 수 있다. 빈 시내를 관광하려면 교통권 패스 구입은 필수다. 걷기엔 멀고 택시를 타면 비싼 거리를 지하철이나 버스, 트램을 타고 마음껏 이동할 수 있다. 필요한 시간에 따라 당일(5.8유로), 24시간(8유로), 48시간(14.1유로), 72시간(17.1유로), 1주일(17.1유로)권을 사면 된다. 처음 이용할 때 버스나 트램 내, 지하철 입구에 있는 기계에 펀칭한 뒤 갖고 다니면 된다. 불시에 검문하는 만큼 늘 갖고 다니는 게 좋다.
쉔부른궁전이나 벨베데레궁전, 미술사박물관 등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오디오가이드를 신청해 듣는 게 좋다. 오디오가이드를 빌릴 때는 여권이 필요하고 개인 이어폰을 갖고 가는 게 편하다. 오페라하우스, 무지크페라인, 콘체르트하우스 등에서는 매일 공연이 열리지만 공연장 사이트에 접속해 미리 예약해야 원하는 공연을 일정에 맞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