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만 가자"…일본 '사토리 세대'가 부러운 이유
입력
수정
지면A19
道 깨달은 사람처럼 욕심 없이“일본인은 학력, 직업 등 모든 부문에서 다들 중간 수준을 선호해요. 외모도 너무 예쁘고 잘생긴 것보다 평범하길 원하죠.”
편하게 살고자 하는 걸 의미
학벌·직업·외모 중간만 원해
일본의 한 유력 일간지 기자가 “요즘 일본에선 ‘중간만 하자’는 게 트렌드”라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주 국제기구인 한중일3국협력사무국(TCS)의 초청으로 일본 중국 기자들과 공동 출장을 다녀왔는데, 꽤 긴 일정을 함께하다 보니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한창 한국의 사교육과 성형 열풍 등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그는 “한국은 좋은 학교, 대기업에 들어가려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고 들었다”며 “일본은 오히려 그런 걸 부담스러워한다. 모든 면에서 평범하고 보통 수준으로 평가받길 원한다”고 했다. 물론 소수 상위권의 경쟁은 있지만 대다수는 그런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지도, 그걸 얻길 원하지도 않는다는 얘기였다.
‘사토리 세대’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일본어 사토리는 ‘득도(得道)’라는 뜻으로, 사토리 세대는 득도한 사람처럼 아무 욕심 없이 마음 편하게 살고자 하는 세대를 의미한다. 이들은 1990년대 초반 태어나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돈, 연애, 집, 차 등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세칭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는 특징을 지녔다.일본 내부에선 이런 사토리 세대를 비판하는 기성세대가 많다. 과거 고도성장 시기 해외를 누비던 일본 종합상사 직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다’고 평한다. 반면 사토리 세대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긍정적인 평도 적지 않다.
사토리 세대는 언뜻 한국의 ‘N포 세대(주택, 결혼 등 많은 것을 포기한 세대)’와 비슷하다. 둘 다 ‘욕망을 포기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두 세대는 전혀 다르다. 사회·경제적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욕망을 포기하는 N포 세대와 달리 사토리 세대는 사회·경제적 압박이 없기 때문에 포기를 선택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사토리 세대는 욕망을 포기하고 중간만 해도 잘살 수 있는 세대라는 얘기다.
굳이 여러 경제지표를 나열하지 않아도 이유는 알 만하다. 청년 실업률이 세계 최저인 3.7%에 불과한 일본과 10.5%에 이르는 한국의 차이다. 일본은 작년 대졸자와 고졸자의 취업률이 완전 고용에 가까운 98%다. 한국 청년들의 체감 실업률은 20%를 웃돈다. 4명 중 1명은 실질적인 실업 상태다.일본인의 ‘중간만 가자’는 성향은 ‘와비사비’와도 통하는 부분이 많다. 와비사비는 부족함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일본의 전통 미의식이다. 줄리 포인터 애덤스의 《와비사비 라이프》라는 책이 발간되면서 삶의 태도로 주목받고 있다.
삶의 태도로서 와비사비는 부족하고 덜 완벽해도 그 자체를 인생으로 받아들이는 게 핵심이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나와 타인에게 솔직하게 살아가는 태도다. 당연히 타인의 시선을 덜 의식하게 된다. 물건에 대한 소유욕도 줄어든다. “외모도 평범하길 원한다”는 일본 신문기자의 말은 “성형하지 않아도 평범한 외모의 나 자신에 만족한다”는 의미에서 와비사비와 일맥상통한다.
한국 청년들도 중간만 해도 괜찮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명문대에 입학하지 않아도 좋은 기업에 취업할 길이 열리면 사교육은 자연스레 잦아들 것이다. 기업들이 서로 졸업생을 데려가면 ‘외모 때문에 면접에서 떨어졌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중간만 해도 잘살 수 있는 일본이라서 일본 청년들은 ‘와비사비 라이프’가 가능하다. 숨막히는 경쟁에 몰린 한국의 청년들에게 사토리 세대는 부러울 따름이다.
summ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