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책도 쇼핑한다
입력
수정
지면A32
송영록 < 메트라이프생명 대표 hkwon8@metlife.co.kr >글로벌 금융회사에 근무하다 보니 해외 출장이 잦다. 올 들어서도 홍콩, 일본, 중국, 미국, 프랑스를 다녀왔다. 빡빡한 일정과 장거리 비행이 피곤할 때도 있지만, 얼마 전 귀국길부터 작은 즐거움이 하나 생겼다. 바로 공항 서점에 들르는 일이다. 예전에는 비행기 탑승 전, 가져온 책을 읽거나 일을 하거나 면세점에 들러 선물을 사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공항 서점을 찾아 외국어로 된 다양한 책을 구경한다.
대부분 사람은 완독을 목표로 책을 산다. 나는 그보다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책쇼핑’을 한다. 일반적인 쇼핑처럼 충동 구매를 하기도 하고, 딱히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책도 산다. 하지만 다른 쇼핑에 비해 비용은 적게 들면서 마음의 효익은 훨씬 크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사 온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서가의 알맞은 자리에 꽂아놓는 재미가 쏠쏠하다. 각국의 고유한 개성을 담고 있는 책 디자인은 그 자체로 멋진 장식품이다.몇 달 전 미국 LA공항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빈센트 반 고흐의 전기를 산 적이 있다. 두 권 모두 1000페이지 가까운 분량에 영어로 쓰였다. 아마 그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점에서 책을 고르며 누렸던 즐거움과 책장에 꽂힌 책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상만으로도 이미 다 보상받은 듯했다. 함께 출장 다니던 동료 임원도 내 방식대로 ‘책쇼핑’을 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 책을 장식용으로 쓰면 얼마나 멋있을까’라며 농담을 나눴다.
전자책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종이로 된 책을 고집할 것 같다. 책이 주는 기쁨은 내용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숨은 보석 같은 책들을 찾아 서점의 서가를 누비는 설렘, 멋진 표지를 바라볼 때의 감상, 종이를 넘길 때 감촉, 인쇄된 글씨를 보는 즐거움, 간혹 연필로 밑줄을 긋는 기쁨까지. 전자책은 종이책이 주는 다채로운 기쁨을 대신할 수 없다.
지금도 책상 위에는 그렇게 구매한 책들이 대여섯 권 놓여 있다. 어떤 책은 이제 겨우 10페이지 읽었고, 어떤 책은 50페이지 정도 읽었다. 더 읽지 못한 채 책장에 꽂히는 책도 있을 것이다. 어떤 책은 새로 산 책에 묻혀 영원히 첫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이 책을 골랐고 읽었으며 혹은 읽다 말았을까? 가만히 책상에 앉아 서가의 책들을 바라보며 그때의 추억과 책에서 얻고자 했던 것들을 되새겨본다. 다 읽은 책, 읽다 만 책, 읽지 못한 책. 그런 것들이 나를 얼마나 변화시켰을지 생각해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