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더 이상 IT 강국 아니다"
입력
수정
지면A1
규제 벽·주52시간에 '발목'국내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사업에 클라우드,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을 접목하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 속도가 경쟁국보다 느리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국은 더 이상 정보기술(IT) 강국이 아니다”(최영상 메타넷 회장)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클라우드·AI 등 사업 접목
'디지털 전환' 속도도 늦어
한국은 ‘IT의 나라’로 통했다. 부호분할다중접속(CDMA·1996년), 컬러 액정 휴대폰(2001년), 와이브로(2004년) 등 하드웨어 개발과 도입 기준으로 ‘세계 최초’ 타이틀이 즐비하다. 올해는 세계 최초로 5세대(5G) 이동통신 서비스와 스마트폰을 상용화했다.기업의 IT 신기술 활용을 의미하는 ‘비즈니스 IT’ 영역으로 넘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직원 250인 이상 국내 기업의 클라우드 도입률은 33.6%에 불과하다. 2017년 통계값이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개국 중 19위다.
클라우드는 AI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활용하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다. 디지털 전환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로 클라우드 도입률이 활용된다.전문가들은 정부 규제 탓에 데이터 수집·가공·활용이 막혀 비즈니스 IT 생태계가 조성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경직된 대학 학제와 획일적인 주 52시간 근로제는 인재 육성과 활용을 어렵게 해 ‘IT 코리아’의 위상을 흔든다고 분석했다.
'주 52시간'에 SW 개발 뒤처져…"IT 인재는 베트남 수준도 안돼"
메타넷글로벌 등 12개 계열사를 두고 있는 정보기술(IT) 그룹 메타넷의 최영상 회장은 1년에 100일 이상 싱가포르에서 지낸다. 글로벌 고객사들을 위한 연구개발(R&D) 조직이 싱가포르에 있기 때문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기술에 익숙한 동남아시아 개발자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감안했다. 메타넷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스마트팩토리, 클라우드 전환을 희망하는 기업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최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수준을 따지면 한국은 인도는 물론 베트남보다도 뒤처진다”고 평가했다.
인재도 없고 활용도 힘들다한국 기업이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첫 손가락에 꼽히는 요인은 인재 부족이다. 새로운 IT를 기존 비즈니스 모델과 접목하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을 추진하려 해도 이를 시행할 ‘선수’가 없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 경제 주간지 포브스는 지난해 9월 ‘한국이 AI 부문의 리더가 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통해 “한국은 인재가 부족해 중국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연구기관들의 분석도 비슷하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SPRi)는 지난해 4차 산업혁명의 4대 축인 AI, 클라우드, 가상·증강현실(VR·AR), 빅데이터 분야에서 2022년까지 개발자 3만1833명(석·박사급 1만9180명 포함)이 부족할 것이란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인재 부족의 주된 원인으로는 경직된 대학 학제를 들 수 있다. 서울대의 컴퓨터공학부 정원은 55명이다. 14년째 그대로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오히려 35명 줄었다. 정부가 전체 정원을 통제하는 데다 학과 간 정원 경쟁도 치열해서다. 사립대도 상황이 똑같다. 학과별 학생 정원에 맞게 교수진을 선발한 탓에 특정 학과나 학부의 정원을 늘리는 게 쉽지 않다.
기업들이 어렵사리 인재를 뽑아도 100% 활용할 수 없다. 주 52시간 근로제 탓에 두세 달 이상 집중적으로 일해야 하는 소프트웨어(SW) 개발 프로젝트 등을 수행하기 힘들다는 게 기업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고급 IT 인력의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나라는 흔치 않다. 미국은 연봉 10만달러 이상 받는 사무직 고액 연봉자의 근로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근무시간 제한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화이트칼라 예외적용(white collar exemption)’ 조항을 뒀다.
한 IT업계 관계자는 “애플 등 실리콘밸리 대기업엔 개발자들이 벗어놓은 옷을 세탁해주는 부서가 따로 있다”며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 직원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기업 발 묶은 데이터 규제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는 신기술들의 공통점은 데이터다. 대량의 데이터를 수집한 뒤 이를 적절히 가공해 기업 경영의 효율을 올리는 게 ‘IT 경영’의 핵심이다. 한국에선 데이터를 모으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개인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데이터는 수집과 가공이 불가능하다.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은 주민등록번호처럼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데이터뿐만 아니라 다른 정보와 결합해 개인의 신분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데이터도 개인정보로 간주하고 있다. 본인 동의 없이 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온라인이나 모바일로 사업을 하면 정보통신망법이, 금융회사엔 신용정보보호법이 적용된다. 개인정보 범위를 폭넓게 잡고 있다는 점은 세 가지 법 모두 동일하다. 지난해 개인을 식별하게 힘들도록 정보의 일부를 조작한 가명정보 사용을 허용하는 개정안이 마련됐지만 시민단체의 반대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성열 SAP코리아 대표는 “기업들이 과감하게 디지털 전환에 나서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클라우드, AI 등을 도입해도 활용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라며 “데이터 규제가 기업들의 발을 묶고 있다”고 말했다.
“소 잡는 칼로 닭만 잡는다”
지난해 국내 대기업 A사는 삼고초려 끝에 IBM에서 AI 전문가를 영입했다. 그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A사를 떠났다. 그의 전문 업무를 뒷받침해줄 만한 IT 인력이 별로 없는 데다 경영진도 IT에 무지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규모가 큰 기업 중엔 A사와 같은 사례가 적지 않다. 디지털 전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외부 전문가를 찾아 나서는 수준엔 이르렀지만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선 고민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한 IT업계 관계자는 “외부에서 데려온 ‘S급’ 인재에게 수준이 낮거나, 일반적인 조직관리 업무를 시키는 사례가 많다”며 “소 잡는 칼로 닭만 잡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중소기업으로 넘어가면 상황이 더 심각하다. 정부의 SW 지원 사업을 통해 보조금을 받아 클라우드를 도입했지만 이를 전혀 활용하지 않는 사례가 상당하다. IT업계에서 중소기업의 클라우드 이용률 통계를 신뢰하지 않는 배경이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