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경제전쟁' 총성 울렸다

방아쇠 당긴 日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

반격 다짐한 韓
"WTO에 제소 등 강력 대응"
< 정부 긴급 대책회의 >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이 1일 서울 서린동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수출상황 점검회의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성 장관은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일본 정부가 반도체 제조 등에 필요한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 규제 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즉각 유감을 밝히고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맞섰다. 한·일이 경제 분야에서 정면충돌하기는 1965년 수교 이후 처음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1일 한국으로의 수출관리 규정을 개정해 스마트폰과 TV 제조에 필요한 반도체 소재 등 세 개 품목의 수출 규제를 오는 4일부터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규제 품목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감광액), 에칭 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등이다. 지금까지는 일본 업체가 한국 기업에 자유롭게 수출했지만 4일부터는 일본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경제산업성은 이번 조치의 이유에 대해 “양국 간 신뢰관계가 현저히 훼손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일본 교도통신은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일본 정부가 한국에 해결 방안을 제시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아 대응(보복)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한국에 적용해 온 ‘화이트(백색) 국가’ 리스트에서 제외시켜 안보를 이유로 통신기기와 첨단 소재의 수출을 엄격히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는 이날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주재로 긴급 회의를 열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성 장관은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비롯해 국제법과 국내법에 의거해 필요한 대응 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일본 정부의 조치는 WTO에 위배될 뿐 아니라 지난주 일본이 의장국으로서 개최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선언문의 합의정신과도 정면 배치된다”고 비판했다. 외교부는 이날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일본의 보복 조치에 항의했다.
< 심각 > 강봉용 삼성전자 DS(반도체·부품)부문 경영지원실장(부사장·맨 오른쪽) 등 반도체, 디스플레이업계 관계자들이 1일 정승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주재로 열린 일본 수출 규제 관련 긴급대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정부서울청사 회의실로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韓 "비상식적 보복" vs 日 "신뢰 깨졌다"…경제 전면戰 '일촉즉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꺼내들었다. 그것도 한국 수출산업의 심장인 반도체·디스플레이를 직접 겨냥했다. 한국이 들여오는 반도체용 부품, 재료의 공급처를 차단해 결과적으로 완제품 수출에 타격을 주겠다는 의도다.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보니 한국은 물론 일본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문제는 한국이 여론전 외에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한 해결이나 수입처 다변화 등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일본 여행 및 소비재 수입을 규제하는 등 다른 맞대응 방안도 현실성이 낮다. “일본이 상당히 오랜 기간 준비해 한국의 가장 아픈 지점을 찔렀다”(박태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통상교섭본부장))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동안 일본의 경제보복 가능성이 계속 우려돼왔음에도 정부가 간과한 데 따른 ‘외교 참사’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재인 정부 초대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낸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서강대 석좌교수)은 “한국 정치가 과거에 눈을 돌리고 있는 사이 산업과 경제가 약해지면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하락했다”며 “일본 정부가 이런 (보복) 조치를 과감히 취할 수 있는 배경”이라고 했다.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의 경제 갈등일본 정부가 한국으로의 수출을 규제하는 세 가지 품목은 반도체 기판 제작용 감광제인 리지스트, 반도체 세정 재료인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용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이다. 한국 주력 수출 품목의 핵심 소재들로 일본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70~90%에 이른다. 일본으로선 한국이 이들 품목의 최대 고객이다 보니 그동안 수출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우대 조치를 취해왔다. 하지만 오는 4일 한국을 우대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앞으로 수출 계약별로 90일가량 걸리는 일본 정부 당국의 승인절차를 거쳐야 한다. 승인 불허 형식을 통해 한국으로의 수출을 완전히 차단할 수도 있다.

한국 정부는 대응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이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일 열린 수출상황점검회의에서 “향후 WTO 제소를 비롯 국제법과 국내법에 의거해 필요한 대응조치를 취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응 카드는 극히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이 통상 분야에서 한국만 차별한 게 아니라 우대 지위에서 배제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형식상 ‘합법적’이지만 불공정한 결정으로 한국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 WTO에 ‘비위반 제소(non-violation complaint)’를 하게 되는데 결과가 나오기까지 2~3년 걸린다.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자칫 한국이 맞대응으로 일본 제품 수입 규제를 하거나 추가관세 등을 매기면 오히려 역으로 WTO에 제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무역보복에 나서고 일본이 플라스틱 제품과 고장력 강판, 영상 의료기기 등으로 수입 규제를 확대하는 ‘강 대 강’ 구도로 간다면 상대적으로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고 분석했다.

“통상 문제로 바라봐선 안 돼”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치는 일본 내부에서도 우려가 적지 않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를 ‘극약’이라고 표현하며 “중장기적으로 한국 기업들의 일본 탈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전문가는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한국 정부의 조치에 불만이 커진 데다 이달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두고 아베 신조 정권이 보수층을 결집하려는 의도도 있다”며 “수출 규제는 일본 정부로서도 달갑지 않은 시나리오인 만큼 전면전인 경제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아직 크지 않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이번 갈등을 통상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문병기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일본으로서도 상당히 부담되는 카드를 꺼내든 만큼 대화의 여지는 오히려 커졌다”며 “경제 보복 또는 WTO 제소보다 외교적, 정치적 대화로 풀고 아울러 우리 부품 소재 장비 등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욱진/조재길/고경봉/김익환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