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1호' 펀드 7개월 만에 수익률 100%…미래에셋 신화의 시작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25) 1999년 적립식펀드 열풍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이 2015년 12월 28일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대우증권 인수와 관련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한경DB
“세 시간 만에 다 팔렸답니다.”

코스피지수가 559로 6개월 만에 두 배로 뛰었던 1998년 12월 14일 오후. 당시 40세 박현주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회사의 운명을 건 ‘회사형(뮤추얼) 펀드’가 조기에 완판됐다는 소식에 안도와 기쁨이 교차했다. 자본금 10억원짜리 미래에셋자산운용투자자문(현 미래에셋자산운용) 설립 2년째 되던 해였다.한국 최초의 뮤추얼 펀드였던 ‘박현주 1호’는 출시 7개월 만에 100% 수익을 돌파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후 이어진 우수한 운용 실적은 2004년부터 2008년 사이 미래에셋이 적립식 펀드 열풍을 주도하는 발판 역할을 한다. 2015년 미래에셋대우 탄생으로 이어지는 ‘박현주 신화’의 서막이기도 했다.
펀드시장의 전환점

박현주 1호의 성공은 공룡 투자신탁사 주도로 성장해온 한국 펀드시장 역사에 중요한 전기로 평가받는다.회사형 펀드는 투자자가 개별 펀드의 주인(주주)으로 참여해 투명하게 운용실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상품이었다. 당시 자산운용업을 과점하고 있던 한국투자신탁(1974년 설립), 대한투자신탁(1977년), 국민투자신탁(1982년)의 소극적인 수익률 공시에 불만을 품고 있던 투자자들은 선진국형 펀드의 상륙에 열광했다.

1997년 미래에셋을 창업한 박 회장은 정부가 자산운용업 진입장벽을 허문 1996년부터 운용 실적으로 승부하는 새로운 금융회사를 꿈꾸고 있었다. 증권가를 돌며 손동식(현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구재상(현 케이클라비스 회장)·이병익(오크우드아이앤씨 사장)·선경래(지앤지인베스트 사장) 씨 등 내로라하는 운용역(펀드매니저)들을 은밀하게 영입했다. 박 회장이 38세 최연소 이사로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강남본부장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1999년은 스타 펀드매니저 진용을 갖춘 미래에셋의 해였다. 닷컴 거품을 등에 업은 눈부신 실적은 뮤추얼 펀드의 대유행을 이끌었다. 모회사였던 미래에셋벤처캐피탈(현 미래에셋캐피탈)도 다음커뮤니케이션 주식에 24억원을 투자해 ‘대박’을 터뜨렸다. 2000년 1월에는 무려 1000억원 넘는 차익을 남기고 주식을 처분했다. 연이은 성공에 고무된 박 회장은 1999년 말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고, 창업 동지인 당시 38세 최현만 상무(현 미래에셋대우 수석부회장)에게 경영을 맡겼다.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다. 1999년 3월 ‘바이코리아 펀드’의 가세와 더불어 천정부지로 치솟던 주식시장은 그해 여름 대우그룹의 워크아웃(채권단 공동관리) 신청으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대규모 펀드 환매(해지)가 잇따랐고 미래에셋 펀드 수익률도 하나둘 퍼렇게 멍들어갔다.
1998년 12월 9일자 주요 조간 1면에 실린 미래에셋자산운용투자자문(현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뮤추얼펀드 출시 광고. 왼쪽부터 강길환 현 미래에셋대우 부사장, 선경래 지앤지인베스트 사장, 구재상 케이클라비스 회장, 김영일 전 한국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 이병익 오크우드아이앤씨 사장, 서래호 미래에셋대우 상무. 광고 게재 당시엔 모두 펀드매니저(운용역)였다. /한경DB
부활의 전조

‘저축에서 투자로….’대우 사태와 닷컴 거품 붕괴로 멈춰섰던 펀드시장의 심장은 역설적으로 최악의 경기 침체를 겪었던 2003년부터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당시 직장인들은 고용 불안과 예금금리 하락으로 노후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환위기 악몽을 떠올린 기업들이 몸집 줄이기에 나서면서 ‘사오정’(45세 정년퇴직)과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란 말이 유행했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로 정기예금 금리는 2004년 연 3%대까지 속절없이 떨어졌다.

하지만 주식시장은 노후를 맡기기에는 여전히 위험천만한 영역이었다. 2002년 943까지 반등했던 코스피지수는 2003년 3월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와 신용카드 사태로 다시 512까지 추락했다. 많은 투자자가 절박한 심정으로 ‘불패 신화’가 건재한 부동산시장에 달려갔고 집값은 무섭게 치솟았다.

가계 자산의 심각한 부동산 쏠림에 당황한 노무현 정부는 무너진 펀드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려 애썼다. 2004년에는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을 시행해 금융회사의 책임과 공시를 대폭 강화했다. 자산운용사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얄팍한 이자의 은행 적금을 펀드로 옮기라는 마케팅에 뛰어든다. 2003년 1월 랜드마크자산운용을 시작으로 이른바 ‘O억 만들기 적립식 펀드’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5년 1월 미래에셋증권 지점 창구에서 한 고객이 적립식 펀드 가입 상담을 받고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제공
펀드 르네상스

“8년 만에 3억원 만드세요.”

주식시장의 반등으로 펀드 수익률이 회복하기 시작한 2004년 3월. 미래에셋은 스스로 쌓은 ‘발자취(트랙 레코드)’를 활용해 펀드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이끄는 상품을 내놓는다. 매달 100만원씩 부으면 8년 뒤 3억원을 모을 수 있다는 ‘3억 만들기 적립식 펀드’였다. 과거 3년간 자사 적립식 펀드가 이뤄낸 연평균 22%의 누적수익률을 근거로 제시했다. 20~40대 직장인들의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제안이었다.

금리 하락으로 수익성 확보에 비상에 걸렸던 펀드 판매회사(은행과 증권사)도 금세 상품의 잠재력을 간파했다. 곧바로 비싼 펀드 판매 수수료를 노린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였다. ‘주식은 장기적으로 오른다’ ‘적립식으로 투자하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강연과 TV 광고가 쏟아졌다.

‘부동산 불패 신화’와 싸우던 정부와 국회도 거들고 나섰다. 2005년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전면 허용(기금관리기본법 개정)하고,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했다. 같은해 여름 노무현 대통령은 8000만원을 적립식 펀드에 투자하면서 “부동산과 주식 중 나는 주식에 걸었다”고 공언했다.

직장인들은 유행처럼 적립식 펀드에 가입했다. 매달 월급 통장에서 빠져나온 납입액은 끊임없이 증시로 흘러들었다. 코스피지수는 2005년 사상 네 번째로 1000선을 돌파하더니 2007년 7월 사상 최초로 2000선마저 넘어섰다. 적립식 펀드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한 2003년 최저점 512의 네 배였다. 금융산업 전체가 막대한 수익을 만끽했다. 은행과 증권사는 2006년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펀드 판매 보수로만 6조원을 긁어모았다.

미래에셋의 ‘독주’

“너도 미래에셋 가입했어?”

전체 적립식 펀드 계좌 수가 1484만 개까지 불어난 2007년 자본시장은 주식형 펀드와 미래에셋 천하였다. 2000년 4조원에 불과했던 전체 주식형 펀드(비적립식 포함) 순자산은 주가지수 급등과 더불어 2007년 말 135조원대로 팽창했다. 미래에셋은 이 중 3분의 1인 45조원을 차지하며 펀드시장을 평정했다.

증시 상승과 함께 순자산 1조원대 공룡 펀드도 쏟아졌다. 2005년 10월 ‘3억 만들기 솔로몬 주식1호’로 시작해 2007년 말엔 15개로 불어났다. 이 중 11개가 미래에셋 상품이었다. 미래에셋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기업도 2007년 6월 말 기준 약 30곳에 달했다. 대형 상장사 최고경영자(CEO)들은 당시 ‘미스터 펀드’로 불린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적지 않은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매도’ 보고서를 쓰기에 앞서 최대 고객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보유 여부를 점검했다. 경쟁 운용사들은 미래에셋이 산 주식을 따라 사느라 풍문에 귀를 기울였다.

2006년 2월 미래에셋증권의 기업공개(IPO)도 미래에셋의 위상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일반청약에 1999년 KT&G 이후 가장 많은 무려 5조8000억원의 뭉칫돈이 몰렸다. 자신감이 오를 대로 오른 미래에셋은 글로벌 운용사 도약을 꿈꾸며 새로운 야심작을 내놓는다.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린 ‘인사이트 펀드’였다. 2007년 10월 나온 이 펀드는 연 2.5%에 달하는 고액 수수료에도 불구하고 보름 만에 3조원의 가입신청이 몰렸다. ‘미래에셋의 첫 상품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신화가 건재하던 때였다.

시련과 과감한 도전

적립식 펀드 열풍은 2008년 가을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을 맞는다. 2006년부터 증시의 불안 요소로 떠올랐던 미국의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문제가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함께 글로벌 금융위기로 폭발한 때였다. 그해 10월 코스피지수는 1000선 밑으로 무너졌다.

미래에셋도 시장을 이기지 못했다. 인사이트 펀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식형 펀드가 1년 만에 반토막 났다. 애써 모은 자산의 절반을 잃은 충격은 개인투자자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다. 2007년 1500만 개에 육박하던 적립식 펀드 계좌 수는 2014년 621만 개까지 내리막을 걸었다. 전체 주식형 펀드 순자산은 2008년 한 해 52조원이 사라졌다.큰 시련을 겪었던 미래에셋은 2015년 대우증권 인수로 다시 과감한 도전에 뛰어들었다. 미래에셋증권과 대우증권이 합쳐진 미래에셋대우의 자기자본은 2018년 말 현재 8조4000억원에 달한다. 2위 NH투자증권(5조1000억원)을 압도하는 규모다. 33세에 동원증권 중앙지점장에 올라 전국 1위 주식 약정액(매매금액)을 달성했던 박현주 회장은 금융투자업계 1인자로 올라섰다. 1997년 창업 18년 만이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