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마저 사랑스러운 나라, 슬로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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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국가와 민족,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의 희로애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감정은 단연 사랑이 아닐까. 이 덕분에 동서고금 역사에서 수많은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소설과 영화, 드라마 등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소재 역시 사랑이다. 나라 이름에 사랑을 뜻하는 ‘LOVE’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슬로베니아(Slovenia). 지도에서 한 번에 찾기 어려운, 이름도 생소한 나라였지만 아는 게 적은 만큼 첫인상은 더 강했다.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곳, 슬로베니아의 매력으로 함께 들어가 본다.
이두용 작가의 여행 두드림 - 슬로베니아
산과 호수의 데칼코마니…200만년 前 동굴 '심쿵하네'
류블랴나, 사랑에 빠지는 이유나라 이름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공항에 도착하니 사방에 사랑 이야기가 지천이다. 알고 보니 이곳의 수도 류블랴나(Ljubljana)라는 이름 역시 슬라브어로 ‘사랑하다(Ljubiti)’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도시와 나라 이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득하다니. 첫 단추에서부터 기대가 목까지 차오르는 기분이다.
공항을 벗어났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여행의 반은 날씨인데, 출발은 조금 걱정됐다. 도심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보인다. 명소인데도 사람이 적다. 류블랴나에는 서울의 4분의 1도 안 되는 면적에 30만 명 정도의 인구가 모여 산다. 서울 인구가 약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한산한 이유가 충분하다.류블랴나는 인구는 적지만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1335년부터 1918년까지는 합스부르크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거쳐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다가 이탈리아와 독일의 점령을 받은 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슬로베니아의 수도로 이어오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다사다난한 역사가 남아있다.
이곳은 크게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볼거리는 많지만, 여정의 시작은 구시가지에 있는 ‘프레세르노프광장’이 좋다. 이곳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등장해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곳이다. 아기자기한 파스텔톤 중세 건물들이 걸음마다 마음을 ‘심쿵’하게 한다.
설렘을 그대로 이어 최고 관광지인 류블랴나 성으로 향했다. 이 성은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비탈에 연결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다. 조금씩 지면에서 멀어질 때마다 도시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케이블카에 오른 사람들은 피부색과 언어가 달랐지만,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외쳤다.이곳은 합스부르크 왕국 시절, 오스만의 공격 방어용으로 지어졌다가 17세기에는 요새와 감옥, 병원 등으로 사용됐고 현재는 슬로베니아 박물관과 함께 웨딩 장소로 쓰인다고 한다.
블레드, 그림엽서 속으로 들어가다
류블랴나만 보고도 사랑에 빠졌다면 사실 큰일이다. 슬로베니아에서 수없이 마주할 절경에선 아주 낮은 단계이기 때문이다. 류블랴나 북서쪽에 있는 블레드(Bled)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림 같은 풍경’의 정석을 만날 수 있었다. 슬로베니아의 속살은 사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에 도착했지만,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 풍광은 대단했다. 호수는 꽤 넓어 보이지만 한 바퀴가 6㎞ 정도 된다고 한다.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운무로 싸인 호수를 찍기 위해 새벽 시간 카메라 가방을 메고 호수로 향했다. 사방이 깜깜하니 아름다운지 어떤지 감이 안 온다.2㎞쯤 걸었을까. 어둠이 거치면서 안개가 오른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엽서나 달력 사진에서나 봤음직한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혼자 보고 있기에 너무 아깝다. 발을 옮길 때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삼보일배(三步一拜)하는 마음으로 몇 걸음에 한 컷씩 사진을 찍었다. 한 바퀴 6㎞면 1시간 조금 넘을 줄 알았는데 2시간 반이나 걸렸다.블레드 호수는 물론 인근 보힌 호수 같은 이 지역의 호수들은 율리안 알프스에서 흘러내린 빙하수가 모여 깨끗하고 아름다운 수질이 특징이다. 다른 지역의 일반 호수보다 사진을 찍었을 때 반영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블레드 호수 중앙에는 섬이 하나 있다.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이 작은 섬은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섬이기도 하다. 섬 안에는 맞춤 크기의 블레드 성당이 있다. 워낙 명소다 보니 블레드에 오면 모두가 섬을 찾는데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룻배 플레트나(Pletna)뿐이다.
전통 나룻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는 기분은 과거로 떠나는 여정 같다. 한국 사람이 많이 찾는지 뱃사공이 ‘안뇽하세요. 이름 뭐예요?’ 같은 어설픈 몇 마디 한국말로 너스레를 떤다. 성당에는 당겨서 종을 울리는 밧줄이 있는데 세 번 울리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한다.
포스토이나, 200만 년 역사가 만든 스케일
잔잔히 넓게 퍼진 블레드 호수와 1535m로 높게 솟은 보겔산에 올랐다면, 이번엔 신비의 땅속 여행이 기다린다. 류블랴나 남서쪽에 있는 동굴의 도시 포스토이나(Postojna)가 바로 그곳이다.
사실 국내에도 전국 곳곳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크고 작은 동굴이 많아 ‘동굴’이라고 하면 신기하거나 대단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의 동굴은 스케일이 다르다. 동굴 좀 다녀봤다는 사람도 이곳에 들어서면 일단 숨을 죽이게 된다. 포스토이나 동굴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고 큰 규모를 자랑한다. 길이만 20㎞. 돌아볼 수 있는 코스는 5.3㎞지만 동굴 열차를 타고 2㎞ 들어가서 1시간30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신세계를 경험한다.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빗물과 지하수에 쉽게 용해되면서 나타나는 지형을 카르스트(Karst)라고 한다. 학창 시절에 한 번쯤 들어봤을 이 단어가 슬로베니아의 크라스(Kras) 지방을 부르는 독일어에서 왔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놀이공원에서 타 봤음직한 열차가 길게 늘어서 있다. 줄 서 있던 사람이 하나둘 올라타면 바로 출발! 좁은 터널을 지나자 시야가 트이면서 200만 년 역사의 거대 동굴이 등장한다. 머리 위로는 낮게 깔린 종유석이 이어진다. 정말이지 놀이공원에 들어온 기분이다. 놀라운 건 이곳 열차가 1872년부터 전기로 운행됐다는 것이다.
기차의 모델과 형태가 여러 번 바뀌었겠지만, 기술력은 대단하다. 땅속으로 한참을 달려 열차가 멈추면 지구의 비밀과 마주하게 된다. 동굴의 높이와 넓이가 어지간한 빌딩이 몇 채 들어와도 될 정도로 크다. 종유석과 석순, 석주 등 크기와 모양도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봤던 것과 견줄 수 없을 정도다. 넋을 잃고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1시간30분이 금방 지난다.
보통 동굴의 종유석이나 석순은 100년에 1㎝가 자란다고 한다. 이곳의 암석들을 보면 200만 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곳에 오래전 동선을 만들고 전기를 연결해 빛을 밝히고 철로를 깔았던 이들의 기술에도 혀를 내둘렀다.
피란, 이탈리아를 닮은 최고 휴양지동굴의 도시에서 9㎞ 거리에 프레드야마성(Predjama Castle)이 있다. 이 성이 특별한 건 동굴을 이용해 절벽에 지은 성이라는 점이다. 동굴에 지은 성으로는 세계 최대다. 외관은 자연을 이용해 지은 유럽의 멋진 성인데 히스토리는 반대다.
15세기 악당 기사로 불리던 에라젬 프레자마스키(Erazem Predjamski)가 자신을 죽이려는 왕의 병사들을 피해 가족과 이곳에 숨어 있다가 결국 살해당한 것. 동굴성이지만 언덕의 반대쪽에 통로가 있어 1년 넘게 버티다가 배신한 부하 때문에 죽게 됐다고 한다. 성 내부에는 공간마다 그때의 생활상을 재현해 놨다. 멋진 성이지만 이곳에서 있었을 당시의 아슬아슬한 삶이 느껴져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발걸음을 돌려 피란(Piran)으로 향했다. 이곳은 슬로베니아 서남쪽에 있는 휴양도시로 이탈리아와 마주하고 있어 정취 역시 이탈리아를 쏙 빼닮았다. 도시로 들어서는데 바닷가에 늘어선 요트들이 눈길을 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넘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집과 함께 눈앞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어 이국적인 느낌은 극에 달한다.
이곳의 중심은 타르티니 광장. 피란 출신 18세기 작곡자·바이올리니스트 주세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의 이름을 땄다. 광장 중앙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한 손엔 바이올린을 다른 한 손엔 활을 들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 넘친다.
광장 주변으로 들어선 건물의 양식과 색깔이 수도 류블랴나와는 아주 다르다. 이런 이국적인 느낌 덕분에 류블랴나에서도 촬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결정적 장면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서유럽의 정취가 가득하지만, 여행 동선이 모호해서인지 이곳을 찾는 한국 사람은 여전히 적다. 패키지로 방문한 여행객만 눈에 띈다.
성당 골목으로 들어서면 정말 이탈리아에 온 기분이다. 이어진 길을 따라 골목을 모조리 돌아보고 싶을 만큼 서민의 정서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골목을 따라 오르면 언덕 끄트머리에 성 조지 대성당이 나타난다. 성당도 아름답지만, 이곳은 피란을 만끽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해가 막 떨어져서 여전히 붉은 바다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마을이 유화로 그려낸 듯 멋지다.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냥 성당 난간에 턱을 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행복은 오롯하게 채워진다. 사랑에 빠진다는 류블랴나를 시작으로 슬로베니아 전체를 사랑(Love)으로 묶을 수 있는 종착지로 피란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슬로베니아=글·사진 이두용 여행작가 sognomedia@gmail.com여행 정보
워낙 작은 나라다 보니 한국에서 슬로베니아로의 직항은 없다. 류블랴나까지는 1회 경유해서 갈 수 있는데 가장 빠른 건 폴란드항공이다. 화·금·토·일에 운항하며 12시간40분 걸린다. 터키항공과 대한항공, 아에로플로트러시아항공은 월~일, 매일 운항하지만 15시간25분~17시간15분 소요된다. 이 중 터키항공은 유일하게 총 3편의 항공이 편성돼 시간대별로 선택할 수 있어 편하다. 터키항공을 이용하는 경유 승객에겐 한나절 동안 이스탄불을 무료로 투어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류블랴나에서 자유여행을 할 땐 버스가 가장 편하다. 홈페이지에서 정류장과 가격, 시간 등을 미리 알 수 있어 동선과 시간을 짜기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