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숙 명예교수 "松商의 세계 첫 복식부기…각국에 알려나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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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에도 '개성부기' 연구하는노(老)교수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신문을 읽고 7시쯤 식사를 한 뒤 어김없이 향하는 곳이 있다. 바로 ‘서당’이다. 중국 사료를 읽는 데 필요한 백화문(白話文)을 익히기 위해서다. 한자를 잘 알아도 백화문을 모르면 중국 사료를 읽는 데 까막눈이나 다름없다. 백화문은 당에서 발생해 송, 원, 명, 청 시대를 거치며 확립된 중국어 구어체. 연구 등을 마치고 그가 귀가하는 시간은 저녁 8시. 은퇴 전부터 진짜로 하고 싶었던 연구에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이다. 개성상인들의 발자취를 좇고 있는 정기숙 계명대 명예교수(82·사진)의 일과다.
정기숙 계명대 명예교수
논문 6편, 해설서 영어 번역 출간
개성부기 연구로 회계학회 공로상
정 교수는 2002년 계명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한국 회계학계의 원로다. 지난 5일 서울역 인근에서 만난 정 교수는 아직 식지 않은 연구 열정을 보여줬다. 고려시대 개성상인이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복식부기(개성부기)에 관한 내용이라면 어려운 고어(古語)에서부터 역사 속 연도까지 설명에 막힘이 없었다.그는 “최근 중국에서 개성부기(簿記)가 자국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며 “중국 주장이 틀렸다는 걸 입증하고 개성부기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식부기란 모든 거래를 대변과 차변으로 나눠 기입한 다음 계정마다 집계하는 기장법이다. 재산의 이동과 손익을 정확히 알 수 있고 잘못을 자동으로 검출할 수 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서방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복식부기를 꼽기도 했다.
15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이 작성한 거래원장이 최초의 복식부기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보다 200년 앞서 개성상인들이 복식부기를 사용했다는 기록들이 나오고 있다. 정 교수는 “일부 중국 학자는 개성부기가 한문으로 돼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한다”며 가당치 않다고 했다.“개성부기에는 한자와 함께 고려에서만 쓰인 이두(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표기법)가 섞여 있습니다. ‘일기장(분개장)’ ‘장책(원장)’ 등 중국에선 쓰지 않는 용어를 쓴 것도 개성부기가 중국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는 증거죠.”
그는 최근 국내 학술지에 네 편, 국제학술지에 두 편의 개성부기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1916년 발간된 개성부기 해설서인 《사개송도치부법》을 현대말로 고쳐 쓴 뒤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한국회계학회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지난달 21일 경주 국제학술대회에서 학술공로상을 수여했다.
정 교수는 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전부터 전해져온 전통 회계문서들이 국내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 조상이 남긴 회계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들을 살아생전에 유네스코기록문화 유산에 등재시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