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주여성 10명 중 4명 "가정폭력 경험"…이주여성, 신고 꺼려
입력
수정
지면A29
"체류권 남편에 달려"국내에 거주하는 결혼이주여성이 23만 명(2018년 기준)을 넘어섰지만 절반에 가까운 여성이 가정폭력 및 성폭력 범죄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편 동의가 없으면 국적을 취득할 수 없는 까닭에 가정폭력에도 속수무책이라는 지적이다. 지난 7일 발생한 베트남 여성에 대한 폭행사건을 계기로 결혼이주여성의 인권 강화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폭력 피해자 31% "신고 안해"
국적 취득시 남편 신원보증 필요
경찰청장 “이주여성 폭력 사건 엄정 수사”민갑룡 경찰청장은 8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서 열린 또람 베트남 공안부 장관과의 치안총수 회담에서 “한국에서 베트남 결혼이주여성 관련 가정폭력 사건이 발생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철저한 수사와 피해자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전남 영암경찰서는 7일 특수상해, 아동복지법 위반(아동학대) 등 혐의로 한국인 김씨(36)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4일 오후 9시부터 3시간 동안 전남 영암군 자신의 집에서 베트남 출신 아내 A씨(30)를 주먹과 발, 소주병으로 폭행했다. A씨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4주 이상 치료해야 하는 상처를 입었다. 김씨는 이날 영장실질심사에서 “아내가 영상통화를 할 땐 한국말을 곧잘 했는데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다”며 “말이 잘 통하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안 통하니까 (폭행했다)”고 변명했다. 그는 이날 구속됐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결혼이주여성(귀화자 포함)은 23만1474명에 달한다. 이들 중 절반 가까이가 A씨처럼 가정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결혼이주여성 체류실태’ 자료를 보면, 결혼이주여성 920명 가운데 42.1%에 이르는 387명이 가정폭력을 당했다고 답했다. 가정폭력 피해 유형(복수응답)을 보면 81.1%(314명)가 가정에서 심한 욕설을 듣는 등 심리·언어적 학대에 시달렸고, 67.9%(263명)는 성행위를 강요받거나 성적인 학대를 당했다. ‘흉기로 위협당했다’는 응답도 19.9%(77명)나 됐다. 가정폭력 시 도움을 요청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없다’(31.7%)는 응답이 ‘있다’(27.0%)는 답변보다 많았다.
배우자 신원 보증 없으면 국적 취득 못해
결혼이주여성이 가정폭력을 당해도 신고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국적 취득이 실질적으로 배우자에게 종속돼 있기 때문이다. 이주여성이 결혼한 뒤 귀화 시험을 보려면 최소 2년간 국내에 체류해야 한다. 이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할 때는 한국인 배우자의 신원보증이 필요하다. 국적 취득 이전이라도 결혼이주여성이 가정폭력 피해를 입증하면 합법적으로 체류 자격을 연장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이혼 판결문에 이혼 귀책 사유가 한국인 배우자에게 있음이 명시돼야 한다. 배우자가 국적 취득 등을 볼모로 이주여성을 협박하거나 폭력을 행사해도 이주여성이 신고를 꺼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채희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 센터장은 “합법적 체류 자격이 보장되지 않은 결혼이주여성은 매를 맞더라도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남편의 초청으로 아내의 가족이 한국에 들어온 경우 결혼이주여성의 선택권은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