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對日 전선에 기업들 앞세우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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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기업총수 잇단 회동에 우려 제기문재인 정부 초대 경제보좌관을 지낸 김현철 서울대 일본경제연구소장(사진)은 8일 일본의 경제보복과 관련, “청와대가 기업들과 공개적으로 만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린 정·경분리 지키며 물밑 협상을"
김 소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정부가 보호해야 할 기업들을 전선(戰線)에 세우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같이 밝혔다.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경제보좌관에 임명됐던 김 소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과외교사’로 불린다. 청와대 핵심 참모이던 그가 ‘경제 컨트롤타워’로 불리는 정책결정자들이 대기업 총수들과 잇달아 만나는 데 대해 우려를 전한 것이다.김 소장은 “우리 정부가 가진 해법이 없어 답답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일본은 지난해 말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우리 산업에서 가장 아픈 곳을 타격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응 카드가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사태 수습을 위해서는 정·경 분리 원칙을 지키며 두 갈래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 정치적 이슈에 경제 문제를 끌어들이며 ‘정·경 일치 노선’을 택한 아베 신조 정부의 패착을 따라 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김 소장은 “한국은 정·경 분리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며 “정치적으로는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기업들이 처한 문제는 물밑에서 조용하게 외교 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게이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소장은 나고야상과대와 쓰쿠바대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위원을 지낸 ‘일본통’이다. 일본제철과 닛산자동차의 경영 자문을 하는 등 일본 경제·산업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靑이 재계와 공개적으로 소통하면 국민 안심하지만 기업엔 나쁜 시그널"
김현철 서울대 일본경제연구소장(사진)은 ‘소재산업 국산화 방침’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청와대와 정부 안팎에선 “이참에 거래처를 다변화하고 기술개발을 통해 일본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김 소장은 “매일 공장을 가동해야 하는 기업들은 당장 공장 라인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7일 일본으로 날아가 사태 수습에 나선 것 역시 기업으로선 상당히 급박한 상황이라는 점을 나타내는 장면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연일 청와대가 재계와 공개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국민을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기업들에는 나쁜 시그널”이라고 꼬집었다.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지만 작년 말부터 이번 사태를 감지한 우리 정부의 대책은 ‘전무’한 상황이라고 했다. 김 소장은 “일본의 이번 경제보복은 굉장히 오래 준비한 것”이라며 “각성청(各省廳·각 정부 부처)을 총 가동해 한국의 급소가 어딘지 오래도록 찾았고 아직 일본의 카드가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 외교부에서 작년 말부터 파악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올 1월 청와대를 떠났다. 일본의 경제보복을 우리 정부가 감지한 작년 말 당시 청와대 경제보좌관으로서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본 셈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경제보복에 나선 것은 ‘아베의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내다봤다. 그는 “아베 총리는 지금 전통적인 시각에서 ‘1965년 체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한·일 청구권협정에 기반한 ‘65년 체제’를 우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뒤흔들고 있다는 일본의 불만이 사태를 촉발했다는 얘기다.최근 외교가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 ‘한·일 정상회담 추진’을 언급한 것은 “너무 앞서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지금 아베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을 추진하면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은 수면 아래서 협상을 펼쳐야 실익이 있다”는 주장이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