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김지영 "강단서 후배 지도…말·글보다 몸짓으로 더 많은 것 전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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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 여는만화책 ‘권법 소년’에 빠져 태권도장을 찾았던 아이는 우연히 발레라는 춤을 알게 됐다. 발레를 배우고 싶어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무용학원마다 전화해 “발레를 가르치냐”고 물었다. 몸이 약하고 유난히 소심했던 아이였다. 늦둥이 막내딸의 극성에 결국 엄마는 아이 손을 잡고 발레학원을 찾았다. 첫날 가장 뒷줄에 서서 동작을 흉내냈다. 코르덴 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은 채였다. “어머, 잘하네. 천재인가봐.”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들은 그 한마디가 ‘발레리나 김지영’의 시작이었다.“진짜 잘해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곧잘 따라 해서였겠죠. 하지만 그 말이 제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발레에 대해 훨씬 더 진지했어요. 어쩌면 너무 외로운 아이였을지도. 나도 잘하는 게 있다는 걸 알았고 그렇게 인정받으니 더 빛나고 싶었죠.”지난 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김지영은 ‘처음’을 떠올렸다. 그는 열한 살에 처음 토슈즈를 신었고 열아홉 살에 최연소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주로 김용걸과 호흡을 맞추며 김주원, 이원국과 함께 국립발레단, 나아가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스타 발레리나 김지영
1997년 국립발레단 최연소 입단
김주원·이원국·김용걸 등과
한국 발레계 르네상스 이끌어
1999년 처음 ‘지젤’로 무대에 섰고 어느덧 불혹을 넘긴 그의 국립발레단 마지막 무대도 ‘지젤’이었다. 지난달 23일 무대에 오르기 전 그는 ‘특별한 공연’이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감정이 섞여 연기가 제대로 안 될까 싶어서였다. 무대에서 내려왔을 땐 아쉬움이 컸다. 자신만 아는 실수들이 마음에 걸렸다. “담담하게 하자고 다짐했지만 이 공연만큼은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커튼콜 때 새삼 깨달았어요. 공연은 나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 오케스트라, 관객과 함께 완성한다는 걸. 그래서 그날 공연은 사실 완벽했다는 걸요.” 축하하고 응원하며 먹먹한 감사의 마음이 오가는 그 분위기 자체가 공연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경희대에서 무용학부 교수직을 제안했던 지난해 초부터 퇴단 시기를 고민했다. 몸을 쓰는 무용수들에게 체중이나 체력 등 몸의 변화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다. 김지영은 “나이가 든다는 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 같다”며 “욕심을 걷어내니 나 자신이 더 잘 보였다”고 말했다.그를 단단하게 만든 것은 러시아 유학 생활이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홀로 러시아로 떠나 바가노바 발레학교에 들어갔다. 영미권 발레와는 전혀 다른 우아함에 반해 러시아를 택했다. 하지만 환상적인 러시아 발레 무대와 현실은 달랐다. “빵을 사려고 한 시간 반을 기다리고 겨울엔 두 달 동안 찬물로 샤워해야 했죠. 러시아 동료들은 너무 잘하고…. 스트레스로 살까지 쪘습니다. 하지만 도망갈 곳이 없으니 그저 버틸 수밖에요.”
졸업 공연 무대는 그의 인생에 또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됐다.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해 온 가족이 그의 졸업 갈라 무대를 보려고 러시아를 찾았다.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는 2부 첫 장면 딸이 등장하기 전에 객석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바로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장례를 치르고 재가 된 어머니와 함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누워 있는 엄마에게 ‘내가 더 열심히 할게’라고 하면서 울었죠. ‘정말 춤을 잘 추고 싶다’는 마음을 깊이 새겼어요.”
돌아온 김지영은 1997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하자마자 주역을 꿰찼다. 그는 “어떤 역이든 ‘내가 최고’라는 자신감으로 임했고 어떤 무대를 마주해도 겁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최태지 단장은 어린 그의 의욕과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국내 최고’에 안주하지 않았다. 2002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퍼스트 솔리스트까지 승급하며 8년간 유럽에서 활동했다.다시 한국에 돌아와 활동했던 국립발레단에서 물러나 ‘인생 1막’을 마무리했지만 춤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아니다. 오는 13, 14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김지영을 볼 수 있다. 발레 갈라 ‘발레 오브 서머 나이트’에서 후배 이재우와 함께 ‘스파르타쿠스’의 3막 아다지오에 나오는 2인무를 춘다.
김지영은 올 가을학기부터 경희대 교수로 강단에 선다. 후배들을 가르치면서도 연이 닿는 무대는 설 생각이다. “몸으로 표현하는 것엔 한계가 없어요. 보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죠. 무대의 크고 작음, 배역의 비중을 떠나 말이나 글보다 더 많은 것을 움직임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