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성공시대 믿고 직업계高 갔는데…취업 막힌 '19세 청년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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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계高 취업률 34%로 추락전남 순천에 사는 K군(19)은 매일 오전 7시부터 낮 12시까지 집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이 끝나면 편의점 도시락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운 뒤 시립도서관으로 가서 밤 9시까지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시험 공부 등 취업 준비에 매진한다. 그는 중학교 시절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졸업 후 일반고 대신 서울에 있는 마이스터고에 진학했다.
고졸취업의 '관문' 역할하던
현장실습 규제 후 채용 급감
최저임금 급등도 '직격탄'
“이혼한 뒤 홀로 두 아들을 키우느라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남들보다 빨리 취업하고 싶었다”는 게 이유다. 고2 때인 2017년까지만 해도 공기업이나 대기업에 취업할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교육부는 2017년 직업계고 졸업생 취업률이 50%를 넘어섰다고 발표하기도 했다.그해 11월 제주도에서 현장실습 중이던 한 직업계고 학생이 안전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작년 2월 교육부는 고졸 취업의 ‘관문’ 역할을 하는 현장실습 참여 기업의 요건을 대폭 강화하고, 사후관리 절차도 엄격하게 바꿨다. 이런 가운데 최저임금 인상, 경기 둔화까지 겹치자 기업들은 고졸 채용부터 줄였다.
K군은 지난해 전력거래소, 시흥시시설관리공단 등 12개 공기업 및 대기업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지난 3월 고향으로 내려와 취업재수를 하고 있지만 올해도 고졸 취업 시장은 호전될 기미가 없다. K군은 “작년에 고졸을 뽑았던 삼성전자도 올해는 채용 계획이 아예 없다고 한다”며 “‘고졸 성공시대’를 열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직업계고로 진학한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2월 직업계고 졸업생의 취업률은 34.8%로 8년 만의 최저치다. 전국에 직업계고 졸업 후 직업이 없는 19세(대학 진학생 포함) 청년이 5만 명가량 된다는 얘기다. 한 직업계고 교사는 “취업이 힘들어지면서 직업계고로 진학하려는 학생도 줄고 있다”며 “지금 한국의 직업계고는 ‘입구’와 ‘출구’가 모두 막힌 상황”이라고 말했다.현장실습 못하고, 최저임금은 급등…직업계高 '취업門' 꽉 닫혔다
서울의 한 직업계고 취업담당 A교사는 요즘 무력감을 느낀다. 제자들을 취업시키기가 너무 어려워져서다. 며칠 전엔 수년간 이 학교 재학생을 채용해온 중견기업 다섯 곳이 올해 직업계고 학생을 뽑지 않겠다고 연락해왔다. 당장 재학생 10여 명이 취업할 곳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A교사를 비롯한 이 학교 선생님들은 두세 명이 짝을 지어 새로운 기업을 방문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냉랭하다.
지난 11일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만난 A교사는 “지난해 현장실습 규제가 강화되고, 최저임금이 크게 오르면서 기업들 사이에선 ‘이럴 거면 굳이 직업계고 학생을 채용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며 “정부가 올해엔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한번 돌아선 기업인의 마음을 되돌리기가 정말 어렵다”고 토로했다.현장실습 탁상행정이 취업 악화시켜
이명박 정부에서 적극 육성해 꾸준히 성장해온 직업계고 취업률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초·중등교육 정보공시 사이트인 학교알리미에 따르면 올해 2월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 등 직업계고를 졸업한 학생들의 취업률은 34.8%로 지난해(44.9%)에 비해 10%포인트 넘게 떨어졌다. 53.6%에 달했던 2017년에 비해선 18.8%포인트나 하락했다. 교육부는 2017년 직업계고 졸업생의 취업률이 17년 만에 50%를 넘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직업계고 교사들은 취업률 급락의 가장 큰 원인이 지난해 급조된 ‘학습 중심 현장실습’ 제도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2017년 11월 제주에서 직업계고 학생 이민호 군이 현장실습 도중 안전사고로 사망했다. 교육부는 부랴부랴 학습 중심 현장실습 도입을 골자로 한 대책을 발표하고 당장 지난해부터 적용했다. 이 제도로 기업들은 실습 학생들을 뽑아도 실제 근무에 투입하지 못한 채 현장에서 ‘학습’만 시켜야 했다. 현장실습 기간엔 최소 4~5차례 교사와 노무사 등으로부터 안전검사를 받아야 한다. 자유롭던 채용 기간도 10월 이후로만 가능해졌다. 기업으로선 직업계고 학생 채용 절차가 크게 까다로워진 것이다. 경남의 한 중견 자동차 부품업체 사장은 “전문대 졸업생 등 우수한 인력을 충분히 뽑을 수 있는데, 유명무실한 학습 중심 현장실습을 하면서 외부로부터 검사까지 받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고 말했다.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경기 악화도 직업계고 학생의 취업난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의 한 중소기업 사장은 “최저임금이 크게 올라 고졸과 전문대생 간 임금격차도 크지 않다”며 “기존에 근무하던 직업계고 졸업생도 내보낸 판에 채용하지도 않을 학생에게 신경써줄 여력이 있겠느냐”고 했다. 직업계고 학생과 교사들은 제대로 된 소통도 없이 급격하게 현장실습 제도를 변경한 데 대해 울분을 토로했다. 올 2월 서울의 한 직업계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정태현 씨(19)는 “학생들은 안전한 현장실습을 원한 것이지 현장실습 자체를 없애라고 한 적이 없다”며 “정부의 조치는 책상에 부딪혀 다쳤다고 해서 책상을 없앤 격”이라고 말했다.
“올해도 채용 전망 어둡다”
올해도 직업계고 학생들의 취업 전망은 밝지 않다. 정부가 현장실습 시 기업에 대한 감사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취업을 가로막는 장벽이 많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수업일수의 3분의 2를 채워야 채용될 수 있도록 했다. 이전까지는 여름방학 이전부터 채용이 이뤄져 학생들은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기업에서 일할 수 있었다. 제도가 변경된 뒤에는 10월 중순은 돼야 비로소 현장에 나갈 수 있다. 직업계고 재학생인 D양(18)은 “대부분 기업의 하반기 채용이 6~9월 이뤄지기 때문에 10월에 우릴 받아줄 기업은 정말 드물다”고 지적했다. 이은아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조위원장(20)은 “채용 시점을 뒤로 늦추는 게 안전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정부 대책은 안전도, 취업도 보장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정부 대책이 발표된 뒤 안전이 후퇴했다는 지적도 있다. 2017년까지는 현장실습생이 근로자 신분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산재보험에 가입됐다. 지난해부터는 학생 신분으로 현장실습에 투입되기 때문에 기업이 스스로 산재보험을 들어줘야 한다. A교사는 “교육부가 특례규정으로 기업들이 학생들의 산재보험을 따로 들 수 있도록 했지만, 상당수 기업이 이런 규정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취업하지 못한 직업계고 학생들에 대한 사후관리도 전무한 실정이다. 학교는 취업률 통계 대상인 재학생의 취업을 위해 뛰고 있지만, 졸업생들에 대해선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이형원 미림여자정보과학고 교장은 “직업계고가 장기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졸업생에 대한 평생교육 체계가 반드시 겸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윤/정의진/박종관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