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24억 명 기반 페북 '리브라'…각국 '화폐개혁' 논의 힘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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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 보류에도 주목받는 '리브라 프로젝트'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 이상 유지돼온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이 무너지고 있다. 우선 미·중 무역마찰이 장기화되는 등 국가 간 협력체제가 약화되는 추세다. 다른 하나는 세계 경제 무대가 온라인, 모바일, 플랫폼 등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각국 국민의 화폐생활이 급변해 법정화폐(法貨) 시대가 가고 가상화폐 시대가 현실화되는 분위기라는 점이다. 최근 페이스북은 전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독자 가상화폐 ‘리브라(Libra)’ 출시를 예고했다. 미 행정부·의회·금융권까지 리브라 출시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선 탓에 15일(현지시간) ‘출시 보류’를 발표하고 한발 물러서기는 했지만 시장 반응은 뜨겁다.
페북은 '리브라' 추진…BIS는 '디지털 통화' 발행 권고
각국 法貨 위상 고민…중앙銀 물가안정 목표 수정 요구도
韓 '리디노미네이션' 추진은 국민 공감대 먼저 형성돼야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2017년 말 기록했던 사상 최고점 대비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던 비트코인 가격이 올 들어 작년 말 대비 세 배 가까이 치솟았다. 한동안 힘을 잃었던 화폐개혁 논의와 각국 중앙은행의 개편 요구도 거세졌다.리브라는 화폐가 갖춰야 할 3대 기능(거래적 동기, 가치지정 동기, 회계 단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종전의 가상화폐는 이 기능을 갖추지 못해 단순 투기 대상으로 평가 절하됐다. 가상화폐가 보편화되는 데도 결정적인 장애요인으로 작용해왔다.
페이스북에 따르면 리브라는 초당 1000건 처리가 가능해 화폐의 3대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거래적 동기를 충족시킬 수 있다. 발행 이전까지 초당 1만 건대로 끌어올린다는 게 페이스북의 계획이다. 달러와 연계한 ‘안전 코인’이란 점에서 가치저장 기능에서도 부족하지 않다.
‘누가 발행하느냐’에 관한 의구심도 불식시켰다. 화폐 속성상 민간에 맡기면 과다 발행돼 물가 상승 등 부작용이 속출할 수 있다. 페이스북은 리브라 발행을 리브라협회에 전적으로 맡길 방침이다. 회원사가 준비금을 맡기면 그에 상응하는 리브라를 전자지갑에 넣어준다. 일반인 사용자들은 이를 받아 클릭해 사용하면 된다. 유로화 창시자인 버나드 리테어 벨기에 루벵대 교수가 구상한 세계 단일통화 ‘테라(Terra: 라틴어로 ‘지구’라는 의미)’와 같은 원리다.리브라 내년 1월 출시 '보류'
실제 리브라가 발행되면 무서운 속도로 각국 국민의 화폐생활에 파고들 것으로 예상된다. 페이스북 이용자는 24억 명으로 세계 인구의 30%를 넘는다. 세계 양대 카드회사인 비자카드, 마스터카드와 제휴했다. 우버, 리프트, 이베이 같은 첨단기술 기업과 세계 최대 송금업체인 웨스턴유니언도 합류하기로 했다. 때맞춰 세계 중앙은행 격인 국제결제은행(BIS)이 각국 중앙은행에 “가상화폐라는 대세를 받아들여 디지털 통화(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를 발행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BIS는 가상화폐는 ‘화폐’가 아니라 단순 ‘투기 대상’으로 금융 안정성을 해친다고 인식해왔다.
리브라가 통용되면 각국 국민의 화폐생활도 급변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세계 인구의 50% 이상이 ‘법화’를 갖고 다니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고액권을 너무 많이 소지하면 뇌물 공여 등 다른 목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배리 아이컨그린 미국 버클리대 교수가 처음 언급한 ‘현금의 저주(curse of cash)’ 시대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페이스북의 리브라 발행 계획 발표와 BIS의 CBDC 발행 권고에 긴장하는 곳은 각국 중앙은행이다. 두 계획에 대한 중앙은행들의 첫 반응은 ‘부정적’이다. 달러 중심 체제 약화를 우려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반대 뜻을 밝혔다. 하지만 가상화폐와 디지털 통화 시대에 맞춰 변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미국 중앙은행(Fed)을 비롯한 선진국 중앙은행은 오래전부터 대책반을 구성해 준비해왔다.
각국 중앙은행이 리브라 같은 가상화폐와 디지털 통화를 받아들인다면 법화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입장부터 정리해야 한다. 금융위기 이후 달러 신뢰 저하에 따른 금본위제 부활, 위조지폐 방지용 신권 발행,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화폐 거래단위 축소)’ 등 다양한 목적으로 거론돼온 화폐개혁 논의도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앙은행의 목표를 수정해야 한다는 요구 또한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중앙은행은 물가안정 목표를 수행해왔다. 밀턴 프리드먼 같은 종전의 통화론자는 ‘천사와의 키스’만 할 것을 주장해왔다. 중앙은행이 물가안정 외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악마와의 키스’라 할 정도로 금기시해왔다.디지털통화 시대 물가 더 안정
각국 국민의 화폐생활 공간이 온라인과 모바일로 바뀌면서 물가는 추세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최종 상품의 가격파괴 효과인 ‘월마트 효과’가 보편화되고 있어서다. 대부분 국가의 물가는 중앙은행이 설정한 목표선을 밑돌고 있다. 가상화폐와 디지털 통화 시대가 전개되면 물가는 더 안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앙은행은 물가안정 외 고용 같은 다른 목표도 중시할 때가 됐다. Fed는 2012년 12월부터 물가안정과 고용창출을 양대 책무로 설정해 통화정책을 운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용창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물가안정 외 목표를 감안한 통화정책 운용방식이 ‘최적통제준칙’이다. 이 준칙은 Fed의 양대 책무를 달성하기 위해 두 목표로부터의 편차를 최소화하는 정책금리 경로를 산출해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방식이다. 고용 목표에 도움이 되면 물가가 일시적으로 목표치를 벗어나더라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제로금리(유럽과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 양적완화 같은 비정상적인 대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음에도 성장률을 크게 끌어올리지 못했다. ‘테일러준칙’과 ‘수정된 테일러준칙’은 한계가 크게 노출되는 만큼 Fed처럼 각국 중앙은행은 최적통제준칙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는 추세다.
Fed의 주장은 어떤 경우든 물가 목표치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다른 준칙과 대조적이다. 통화론자는 특정 국가가 금리 등을 변경할 때 ‘통화준칙’에 의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테면 한국은행의 인플레 목표선이 2%일 때 이보다 물가가 올라가면 자동적으로 정책(기준)금리를 올려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 준칙의 핵심이다.
정권 이익 위한 화폐개혁 경계를
현대통화론자(MMT·modern monetary theory)의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MMT의 핵심은 이렇다. 물가에 문제가 없는 한 재정적자(쌍둥이 이론에 의해 무역적자도 포함)와 국가부채를 두려워하지 말고 달러를 찍어 써도 문제가 없다는 시각이다. 양적완화를 중시하는 이론이다.한국에서도 리디노미네이션 논쟁이 거세다. 화폐개혁만큼 국민의 관심이 높은 것은 없다. 그러나 경기 안정과 국민 공감대 형성이 전제돼야 한다. 금융위기 이후 화폐개혁을 추진한 국가를 보면 선진국은 이 조건 충족 여부를 중시했지만, 신흥국은 장기 집권 등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급하게 추진했다.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