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빼먹는 게 임자"…묻지마 R&D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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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뚫린 재정
정부 지원금 노린 '유령 연구소'
중소기업들 '우후죽순' 설립
"돈 받아드립니다" 브로커 활개
중소기업계에서는 연구개발(R&D) 지원금이 ‘기업 안정자금’으로 불린다. 사업 자금으로 R&D 지원금을 전용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정부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서류상 요건만 충족하면 문제 삼지 않는다. R&D 예산이 ‘눈먼 돈’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렇다 보니 지원 서류를 잘 꾸며주는 ‘R&D 브로커’가 활개치고 있다. 이들은 지원금의 5~10%를 성공보수로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브로커 역할을 해온 R&D 컨설팅업체 44곳이 적발됐고 이 가운데 14곳이 수사 의뢰됐다.이장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혁신전략연구소장은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R&D 자금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것 또한 현실”이라며 “지원금을 늘리면서도 효율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기술 살짝 바꿔, 中企 R&D 성공률 93%…사업화는 절반에 불과
중소기업 연구개발(R&D) 자금이 비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R&D 과제 성공률에서도 드러난다. 2017년 기준 중소벤처기업부 R&D 최종평가 과제 4651건 중 4317건이 성공 판정을 받았다. 성공률이 92.8%에 이른다. 전체 중소기업 연구소의 76.8%가 학사 이하 학위 소지자며 연구원 10명 이하인 곳의 비중이 95.9%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상식적인 숫자다.전문가들은 중소기업 연구소들이 이미 보편화된 기술을 개발했다고 보고하고 정부 지원금을 타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 기술통계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세계 최초 신기술 개발에 뛰어든 사례는 2.4%에 불과하다. 반면 국내와 신흥공업국에서 보편화된 기술을 다시 연구한 비중은 76.5%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될 것만 했다’는 얘기다.
기업들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R&D 역량이 부족해서기도 하지만 제도 자체의 결함도 있다. 중소기업이 과제에 도전해 실패하면 지원금을 다시 돌려줘야 한다. 향후 3년 동안 정부 R&D에도 참여할 수 없다. 한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 대표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보유한 기술을 조금 바꿔 새롭게 연구과제로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R&D 사업의 비효율성은 사업화율에서도 드러난다. R&D에 성공한 뒤 사업화에 성공한 비율은 2017년 기준 51.6%에 불과했다. 연구에는 성공했지만 실제 사업엔 도움이 안 됐다는 얘기다.정부가 중소기업 R&D 자금에 대해 ‘감시’에 가까운 규제를 가하고 있어 사업화가 가로막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헬스케어 기업 대표는 “정부 지원 사업은 월단위로 보고서 제출을 요구하면서 처음 설계한 목표대로 과제가 진행되는지를 확인한다”며 “산업 트렌드는 빠르게 변하는데 수년 전 설정한 목표대로만 하라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