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빼먹는 게 임자"…묻지마 R&D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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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뚫린 재정의료기기 기업인 A사는 업계에서 ‘정부 지원금 사냥꾼’으로 불린다. 최근 5년간 중소벤처기업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여러 부처에서 10차례 정책자금을 받았다. 회사 연구소도 정부 지원금으로 세웠다. 이 조직엔 박사 학위를 가진 연구소장과 학사 학위 직원 두 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름뿐이다. 연구소장의 본업은 마케팅이다. 연구원들도 평소엔 연구와 관련 없는 일을 한다. 정부 지원금을 목적으로 ‘유령 연구소’를 세운 것이다.
정부 지원금 노린 '유령 연구소'
중소기업들 '우후죽순' 설립
"돈 받아드립니다" 브로커 활개
중소기업계에서는 연구개발(R&D) 지원금이 ‘기업 안정자금’으로 불린다. 사업 자금으로 R&D 지원금을 전용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정부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서류상 요건만 충족하면 문제 삼지 않는다. R&D 예산이 ‘눈먼 돈’으로 불리는 이유다.중소기업 부설 연구소 수는 2015년을 기점으로 대기업을 앞질렀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곳이 드물다. 지난해 말 기준 3만8644개 중소기업 연구소의 95.9%(3만7059개)는 연구원이 열 명에 미치지 못했다. 2017년 말 기준으로 중소기업 연구원의 76.8%는 학사 이하 학력자였다. 3조원 안팎의 세금을 쓰는 중소기업 R&D의 현주소다.
그렇다 보니 지원 서류를 잘 꾸며주는 ‘R&D 브로커’가 활개치고 있다. 이들은 지원금의 5~10%를 성공보수로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브로커 역할을 해온 R&D 컨설팅업체 44곳이 적발됐고 이 가운데 14곳이 수사 의뢰됐다.이장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혁신전략연구소장은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R&D 자금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것 또한 현실”이라며 “지원금을 늘리면서도 효율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기술 살짝 바꿔, 中企 R&D 성공률 93%…사업화는 절반에 불과
중소기업 연구개발(R&D) 자금이 비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R&D 과제 성공률에서도 드러난다. 2017년 기준 중소벤처기업부 R&D 최종평가 과제 4651건 중 4317건이 성공 판정을 받았다. 성공률이 92.8%에 이른다. 전체 중소기업 연구소의 76.8%가 학사 이하 학위 소지자며 연구원 10명 이하인 곳의 비중이 95.9%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상식적인 숫자다.전문가들은 중소기업 연구소들이 이미 보편화된 기술을 개발했다고 보고하고 정부 지원금을 타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 기술통계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세계 최초 신기술 개발에 뛰어든 사례는 2.4%에 불과하다. 반면 국내와 신흥공업국에서 보편화된 기술을 다시 연구한 비중은 76.5%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될 것만 했다’는 얘기다.
기업들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R&D 역량이 부족해서기도 하지만 제도 자체의 결함도 있다. 중소기업이 과제에 도전해 실패하면 지원금을 다시 돌려줘야 한다. 향후 3년 동안 정부 R&D에도 참여할 수 없다. 한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 대표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보유한 기술을 조금 바꿔 새롭게 연구과제로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R&D 사업의 비효율성은 사업화율에서도 드러난다. R&D에 성공한 뒤 사업화에 성공한 비율은 2017년 기준 51.6%에 불과했다. 연구에는 성공했지만 실제 사업엔 도움이 안 됐다는 얘기다.정부가 중소기업 R&D 자금에 대해 ‘감시’에 가까운 규제를 가하고 있어 사업화가 가로막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헬스케어 기업 대표는 “정부 지원 사업은 월단위로 보고서 제출을 요구하면서 처음 설계한 목표대로 과제가 진행되는지를 확인한다”며 “산업 트렌드는 빠르게 변하는데 수년 전 설정한 목표대로만 하라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