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심리적 IMF 위기'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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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막힌 제도·관행·의식의 위기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연초 인터뷰에서 “올해 한국 사회는 대전환의 고통을 겪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해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을 때 ‘설마’ 했다. 그 말이 새삼 혜안으로 다가온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한국 산업의 밑천을 들춰내고, 미국의 오불관언은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때의 쓰라린 기억을 소환한다.
각자도생…金모으기도 '각자'
'黨同伐異' 정치, 경제서 손떼야
오형규 논설위원
예민한 식자들 사이에는 ‘위기’라는 공감대가 퍼져 있다. 구조적 저성장에도 구조개혁을 미루고, 꽉 막힌 제도·관행·의식에 갇혀 ‘심리적 IMF 위기’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수출 감소, 성장률 추락, 간판기업들의 신용 하락, 금·달러·해외부동산 투자 급증 등 증상은 차고 넘친다. 서울 도심까지 한 집 건너 ‘임대’여서 서민들도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모두의 속마음에 똬리를 튼 것은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다. A교수는 ‘나이아가라 증후군’에 비유했다. “눈앞에 폭포의 추락 위험이 빤히 보이는데, ‘쓸 카드’조차 없다는 게 주저앉을 만큼 두렵다.” B컨설턴트는 “경제에 사이렌이 요란하고 바닥이 꺼지는 ‘싱크홀’ 같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현장 목소리는 더 절절하다. 기자재 업체 C사장은 “경기가 좋을 때는 신품이 잘 나가고, 안 좋으면 중고품이라도 나가는데 지금은 어떻게든 고쳐 쓰겠다는 수리 요청만 들어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뿌리산업’인 금형설비도 예전에 30억원짜리가 지금 10억원이다. 1990년대 경공업이 중국 쇼크로 무너졌다면, 지금은 범용 제조업 전반이 2차 중국 쇼크로 와해될 판이다. 게다가 정부는 임금, 세금, 건강보험료, 전기료 등 비용구조까지 건드려놨다.
은퇴를 앞둔 60~70대 기업인들의 최대 고민은 약탈적 상속세다. 장비업체 D회장은 “평생 일군 기업인데 상속세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상속세 없는 나라로 옮길 생각”이라고 토로했다. 로펌들은 상속과 해외투자를 엮어 나가려는 기업들로 웃지 못할 특수를 누린다.IMF 위기는 경쟁력 저하와 방만함에 의한 신용경색이었지만, 지금은 온갖 합병증이 겹친 만성질환 상태다. E교수는 국가주의 비대화와 체제(시장경제)의 와해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시장에서 이뤄져야 할 의사결정이 국가·사회로 넘어가, 단순히 몇몇 분야의 규제완화로 풀릴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는 경제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이규성, 이헌재, 윤증현 등 경제수장과 사명감 투철한 관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안 보인다.”
포퓰리즘 정치가 힘든 구조개혁을 기피하고, 미래비전을 세우지 못한 데 위기의 뿌리가 있다. 여야 막론하고 온통 정신은 내년 총선에 팔려 있다. 관료들은 청와대 위세에 치여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마냐냐(스페인어로 ‘내일’) 경제관’만 주문처럼 읊어댄다.
과연 그들에게 AI, 4차 산업혁명 등 대변혁에 대처할 능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구(舊)산업이 한계에 봉착했으면 신(新)산업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 텐데, 자금력 있는 대기업의 스타트업 M&A를 통한 ‘혁신의 회수시장’을 국내선 상상도 못 한다. 대기업은 ‘불공정의 화신’, ‘개혁대상’으로 치부될 뿐이다.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해서도 ‘죽창가’ ‘의병’ ‘금모으기’ 같은 정신승리만 넘친다. 죽창이 먼저 어디로 향했고, 왜 의병이 정유재란과 병자호란에는 거의 사라졌는지 안다면 그런 소리를 못 했을 것이다. 지금 국민들이 금모으기에 나서긴 했다. 다만 ‘각자’ 모은다.
진짜 위기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 홍콩 금융가에선 “한국이 뭘 알고 대처하는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공공연하다고 한다. 머지않아 핫머니가 한국에 대해 스트레스 테스트를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내년 상반기 선진국 경기가 실질적으로 주저앉으면 위기를 체감할 것이란 이코노미스트의 전망도 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무리지어 상대를 치는 ‘당동벌이(黨同伐異)’를 정치의 본령으로 안다. 이런 정치가 “제발 경제를 놓아달라”는 경제계 호소를 한 귀로 흘린다면 그때는 ‘퍼펙트 스톰’이 덮칠지도 모른다.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