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이 안 보인다"…스타트업 이직 고민하는 삼성 직원들

경력 채용 현장의 '脫삼성'

유망 벤처 경력직 모집했더니
삼성맨 지원서만 수십장
삼성전자 대리급 직원 K씨는 주말마다 중국어 학원에 간다. 중국 법인 근무를 원해서가 아니다. 고액 연봉이 보장된 중국 기업으로 아예 옮겨가기 위해서다. K씨는 “얼마 전 사내에서 촉망받던 선배 한 명이 중국계 기업으로 옮기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며 “앞으로 이직 기회가 더 많을 것 같아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삼성의 젊은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다. 회사원 성공의 상징인 ‘삼성 임원’을 바라보고 뛰었던 과거와 달리 ‘이직’을 생각하는 직원이 늘고 있다는 게 삼성 안팎의 얘기다. 유망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경력 채용 현장에선 ‘탈(脫)삼성’ 분위기가 감지된 지 오래다. 한 채용 담당자의 얘기다. “삼성에서만 지원서 수십 장이 들어옵니다. 직원 수가 워낙 많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저기가 한국 대표 기업 맞나’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도 합니다.”삼성 직원들은 자신과 회사의 ‘미래’가 안 보인다고 말한다. “쿠팡, 배달의민족 같은 업체로 이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업들은 아마존처럼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데 삼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부터 비전이 사라졌습니다.” 삼성전자 IM(정보기술·모바일)부문 5년차 직원은 조직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자발성을 보장하지 않는 ‘갑갑한’ 조직 문화도 젊은 직원들의 마음을 떠나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리스크 최소화’ ‘상명하복’ 문화의 영향이 크다. 사내 메신저 문구까지 알고리즘으로 관리하는 회사를 계속 다닌다는 게 쉽지 않다는 푸념도 나온다. DS(반도체·부품)부문 대리급 직원은 “직원이 아이디어를 내면 위로 올라가는 사례가 거의 없다”며 “보너스보단 자율성이 더 보장되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관료화된 조직에 실망하는 직원도 적지 않다. 삼성의 굳건했던 리더십이 흔들린 어느 순간부터 조직에 ‘보신주의’가 팽배하다는 게 삼성 내부의 공통된 의견이다. 과장급 한 직원은 “특별한 실적 없이 눈치만 보면서 살아남는 임원을 여럿 봤다”며 “‘위아래 할 것 없이 일단 기본만 하자’는 생각이 조직에 팽배하다”고 꼬집었다. 이 밖에 외국계 출신으로 채워지는 임원 자리, 임원 자제와 일반 직원 간 보이지 않는 차별 등도 ‘직원 이탈’을 가속화하는 원인으로 꼽혔다.회사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이직을 원천 차단하려고만 하는 데 실망했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 삼성 직원은 “삼성전자 본사 직원들이 삼성리서치아메리카(SRA)에 갔다가 경쟁사로 이직하는 사례가 늘자 회사에선 SRA에 들어가는 루트를 아예 막아버렸다”며 “왜 회사를 떠나려고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인력 유출을 막는 데만 신경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정수/고재연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