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펑 中 前총리 별세…끝내 떼지 못한 '톈안먼 학살자' 꼬리표

'장수 권력' 누렸지만 2인자로 남아…톈안먼 운동 30주년에 별세
한중 수교 후 첫 방한 총리로 한국과도 인연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때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한 리펑(李鵬) 중국 전 총리가 22일 별세했다.리 전 총리는 중국 혁명 영웅의 자녀로 중국 권력의 핵심부에서 장수 권력을 누렸지만, '톈안먼 학살자'라는 꼬리표는 떼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그는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중국 최고 지도부 자리에서 보냈다.

톈안먼 사태는 그의 권력 역정에서 공이자 과로 작용하며, 평생을 따라다녔다.리 전 총리는 톈안먼 사태 때 강경 진압을 주장하며 자오쯔양(趙紫陽·1919∼2005)과 맞섰고, 결과적으로 당시 최고 권력자인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에게 이를 관철하며 톈안먼 시위대를 해산하는 '공'을 세웠다.

이를 토대로 실세로 부상한 그는 한편으로 '6·4 학살자', '톈안먼 학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그가 권력의 핵심부에 있으면서도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2인자'로 남아야 했던 이유도 '학살자'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녔기 때문이다.리 전 총리 역시 톈안먼 사태 진압에 대해 상당히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4년 8월 공산당 기관 잡지인 구시(求是)에 기고한 글에서 톈안먼 사태를 무력진압한 것은 덩샤오핑의 확고한 지원 아래 이뤄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리 전 총리는 1988년 총리 취임 당시 숱한 난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덩샤오핑 동지의 격려가 필요했던 겁많은 초보자였다고 당시 자신의 심경을 술회했다.톈안먼 사태로 실세가 됐고 동시에 비난의 표적이 됐던 그는 톈안먼 사태 30주년을 맞은 올해 세상을 떠났다.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중국 인민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그의 아버지 리숴신(李碩勳)과는 정반대되는 삶을 산 셈이다.

리숴신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주더(朱德) 등과 함께 난창(南昌) 봉기를 주도하고, 후에 장제스(蔣介石·1887∼1975)의 국민당에 체포돼 처형을 당하면서 혁명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혁명 영웅의 자제인 리 전 총리는 양친을 모두 어린 나이에 여읜 뒤에도 부모의 후광에 힘입어 중국 지도층으로 성장해 나갔다.

부모의 혁명 동지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그는 17세에 러시아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귀국한 뒤에 곧바로 기술 관료로 성장했다.

그는 전력 부문의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고, 중국 전력공업부 부장(장관)까지 역임하며 기술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리 전 총리는 1992년 총리 재직 당시 중국 싼샤(三峽) 댐 프로젝트 승인을 지휘하는 등 경력의 대부분을 전력 산업에서 쌓았다.

리 전 총리의 자식들도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 전력 부문에서 경력을 쌓았다.

딸 리샤오린(李小琳)은 중국의 '전력여왕'으로 불리며, 중국전력국제유한공사 회장을 역임했고, 아들 리샤오펑(李小鵬) 산시(山西) 성장도 중국의 5대 전력회사인 화넝(華能)그룹 이사장으로 일하다 공직으로 진출했다.

리 전 총리는 공직을 물러난 후에도 자식들을 통해 중국의 전력, 석탄, 에너지 분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거액을 부정 축재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으며, 자녀들 역시 조세 회피와 비리 의혹으로 구설에 올랐다.
리 전 총리는 한국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는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1994년에는 중국 총리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한중수교를 앞두고 방중한 이상옥 전 외무장관에게 한중 양국관계를 '물이 흐르면 자연히 도랑이 된다'는 의미의 수도거성(水到渠成)에 비유하며, 양국 수교가 임박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전인대 상무위원장 시절에는 2002년 중국을 방문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회담을 하기도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