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묻지마 도급규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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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사고는 결국 안전관리 문제“진짜 무지는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학습의 거부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말이다. 하청근로자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등장하는 ‘위험의 외주화’ 프레임에 갇힌 확신편향과 실효성을 따지지 않는 막무가내식 규제에도 학습거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규제만 양산해선 재해 못 줄여
정진우 <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 >
사고원인을 심층적으로 규명하려 하지 않고 도급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식의 접근에서는 도급관리의 공백이 어디에 있는지, 왜 문제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탐구심과 진지함을 엿볼 수 없다. 도급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도급을 없애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사고원인이 도급이라고 진단할 뿐, 도급에 따른 위험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를 놓고 끈질긴 분석과 구체적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국제적으로는 도급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도급에 대한 안전관리 불량이 나쁜 것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선진국의 법 기준은 도급작업 자체를 막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방법으로 이뤄지도록 하고, 어떤 도급작업이 수행되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도급 자체를 악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산업안전보건법 하위법령을 둘러싸고 일각에서 주장하는 도급금지, 도급승인 대상 확대도 이런 시각의 반영이다.
도급금지 작업이 다른 작업과 비교해 위험하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도급금지제도는 해외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도급을 금지한다고 해서 도급해온 작업 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청이 작업하던 것을 원청이 작업하는 것으로 바뀔 뿐이다. 따라서 도급을 금지하더라도 안전관리가 충실하지 않으면 재해는 또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작업을 하든 충실한 안전관리다. 도급을 줬다고 해서 하청에만 안전관리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원청에도 그 역할에 걸맞은 책임을 부과하면 재해를 예방할 수 있다.
도급승인 역시 외국에는 없는 규제다. 재해 예방효과가 없어서다. 리스크 관점에서 보면 임시돌발작업이 가장 위험하다. 이런 작업은 도급승인 대상으로 할 수 없고, 승인을 받도록 하면 작업 시점을 놓쳐 오히려 사고를 조장할 수 있다. 도급승인을 받더라도 위험요인은 생물처럼 변하기 때문에 사전 승인으로는 후에 발생하는 임시돌발작업과 같은 가변적인 위험요인을 걸러낼 수 없다. 컨베이어 벨트 등 작업을 도급승인에 넣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다. ‘김용균 씨 사고’가 도급승인이 없어 발생한 것인가. 도급승인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위험요인에 대한 안전관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안전규제라고 해서 ‘묻지마’ 규제가 돼서는 곤란하다. 도급규제에도 품질이 확보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해예방의 실효성은 거두지 못하고 사회적 비용만 늘리게 된다. 또 도급 자체를 규제하는 것은 중소기업 영역에 대기업이 침투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도급규제의 현장 작동성에는 관심이 없고 실효성 없는 규제를 양산하는 식의 접근으로는 도급에 따른 재해를 줄일 수 없다. 어떻게 규제하는 것이 하청근로자 재해를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인지 충분히 학습하고 정교하게 접근해야 한다. 학습 없는 규제는 위험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