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 재량근로제 지침 발표…일본 수출규제 대응 차원

'구체적 지시' 아닌 업무 기본목표·내용·기한·근무장소 등은 지시 가능
"출·퇴근 시각 엄격하게 적용하면 안 돼"
정부가 31일 유연근로제의 일종인 '재량근로제' 활용의 가이드라인을 내놨다.노동시간 단축 대상 사업장이 필요할 경우 재량근로제를 도입해 주 52시간제를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이날 재량근로제의 구체적인 운영 지침을 담은 '재량근로제 운영 안내서'를 발표했다.

재량근로제는 탄력근로제와 함께 유연근로제의 일종으로, 업무 수행 방법을 노동자에게 위임할 필요가 있는 업무의 경우 사용자가 노동자 대표와 서면 합의로 정한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하는 제도다.노동자의 실제 노동시간은 법정 노동시간 한도를 넘을 수 있다.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법정 노동시간 이상의 일을 시키는 데 재량근로제를 악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현행법은 재량근로제 도입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다.재량근로제를 적용할 수 있는 업무는 근로기준법 시행령과 노동부 고시로 정해진다.

전문성과 창의성이 필요해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업무 수행 방법을 정할 필요가 있는 업무로, 연구개발(R&D), 정보통신기술(ICT), 언론·출판, 디자인 등 모두 14개다.

재량근로제를 도입하는 사용자는 서면 합의서에 업무 수행 수단과 시간 배분 등에 관한 '구체적 지시'를 하지 않는다고 명시해야 한다.이는 재량근로제 도입을 추진하는 사용자가 가장 혼란을 겪는 대목이다.

구체적 지시의 범위가 모호해 어떤 지시는 가능하고 어떤 지시는 불가능한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부 가이드라인은 재량근로제를 도입한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할 수 있는 지시의 범위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사용자는 재량근로제를 도입한 상황에서도 업무 수행 수단, 시간 배분과 관계없는 업무의 기본적인 목표, 내용, 기한과 근무 장소 등에 관한 지시는 할 수 있다.

업무 진행 상황과 정보 공유 등을 위한 보고도 받을 수 있다.

업무 수행에 필요한 회의, 출장, 출근 등의 의무 부여와 출·퇴근 기록도 가능하다.

다만, 업무 성질에 비춰 보고나 회의 주기가 지나치게 짧아 사실상 노동자의 재량을 제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노동시간 배분에서는 1주 단위로 업무를 부여하거나 업무 수행에 필요한 근무 시간대를 설정할 수도 있지만, 일반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출·퇴근 시각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안 된다.

가이드라인은 재량근로제 대상 업무의 범위도 좀 더 구체화했다.

연구개발에는 제조업 실물 제품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게임, 금융상품도 포함된다.

정보처리 시스템 분석과 설계 등을 재량에 따라 수행하는 프로그래머도 재량근로제 대상이다.

재량근로제 대상 업무가 아닌데도 이를 도입했거나 사용자가 재량근로제의 허울 아래 구체적인 지시를 하며 일을 시킨다면 재량근로제를 도입한 서면 합의는 무효가 되고 법정 노동시간 위반은 처벌 대상이 된다.

작년 10월 노동부 실태조사에서 재량근로제를 도입한 사업장은 2.9%에 불과했지만, 주 52시간제 시행에 따라 재량근로제도 확산할 전망이다.

노동부가 재량근로제 가이드라인을 내놨지만,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남아 있어 사업장이 초기에 혼란을 겪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이번 가이드라인 발표는 일본의 수출 규제 대응 조치이기도 하다.

일본의 수출 규제 대상인 주요 소재 등의 국산화에 나선 국내 기업이 재량근로제로 주 52시간제의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 대응을 위한 소재·부품 등의 시급한 국산화를 위해 연구개발 직무를 중심으로 재량근로제의 명확한 운영 기준 마련 요구가 커지는 상황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 국산화를 위한 연구개발 업무에 대해 주 52시간제의 예외가 적용되는 특별연장근로도 허용하기로 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이날 성명에서 "정부 스스로 노동시간 단축 법·제도를 회피할 빌미를 계속 제공하고 있다"며 "장시간 노동과 공짜 노동을 부추기는 몰지각한 정책 행보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