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재치와 풍자…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피로, 한방에 날렸다
입력
수정
지면A28
제7회 박카스 29초영화제 시상식한 남학생이 헐레벌떡 강의실을 향해 달린다. 그와 달리 친구는 느긋하게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걷는다. 먼저 도착한 학생은 강의실 문을 벌컥 연다. 그러나 아쉽게도 결석 처리가 된다. 이름이 ‘가윤호’인데 출석을 가나다순으로 부르다 보니 이미 ‘이씨’ 성을 가진 친구들 순서로 넘어간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여학생들이 웃으며 “아웃”을 외친다. 뒤늦게 도착한 친구도 강의실 문을 연다. 친구 이름은 ‘하준철’. 출석부 맨 뒤쪽에 있다 보니 교수님의 호명에 “네”라고 여유롭게 대답한다. 여학생들은 이번엔 “세이프”를 외친다. 다음날, 윤호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일찍 강의실로 와 여유롭게 기다린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몰라주는 교수님은 “오늘은 뒤에서부터 출석부를 불러볼까?”라고 말한다.
동아제약·한경 공동 주최
신하늘 감독, 일반부 대상 영예
남모를 고충 재치있게 연출
진은빈, 청소년부 최우수상
신하늘 감독이 ‘제7회 박카스 29초영화제’에 출품한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피로는 가나다순이다’의 내용이다. 이 작품은 31일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 다산홀에서 열린 영화제 시상식에서 일반부 대상을 받았다. 출석부를 늘 가나다순으로 부르는 관행 때문에 ‘ㄱ(기역)’으로 시작되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남모를 고충’을 재치있게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동아제약과 한국경제신문사가 공동 주최한 이번 영화제는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피로는 OOO이다’라는 주제로 열렸다. 피로해소제 박카스로 유명한 동아제약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은 물론 국민의 피로 해소를 돕는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 2013년부터 매년 박카스 29초영화제를 열고 있다.
이번 영화제의 출품작은 박카스 29초영화제 첫 회(1581편) 이후 두 번째로 많았다. 일반부 805편, 청소년부 103편 등 모두 908편이 출품됐다. 심사위원들은 “자칫 부정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 ‘피로’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특히 1020세대 특유의 위트 넘치는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최근 동아제약이 ‘간호학과의 피로’ 등 1020세대에 초점을 맞춘 바이럴 광고를 많이 선보인 것과 비슷한 흐름이다.일반부 최우수상은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피로는 최종면접 가는 길이다’를 찍은 지승환 감독에게 돌아갔다. 버스 안에 양복을 차려입은 남성이 앉아 있다. 그는 “오늘은 최종 면접 가는 날.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고 말한다. 각오를 다지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뭔가 이상하다. 곧이어 내레이션이 흐른다. “차창 밖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그 순간, 난 깨달았다. 버스를 잘못 탔구나.” 그는 버스에서 내려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그러고는 박카스 한 병을 들이켠다. 이 작품은 최종 면접에 가게 된 취업준비생의 고충을 유쾌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소년부 최우수상은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피로는 상태 메시지를 입력하는 것이다’를 만든 세종시 성남고의 진은빈 감독이 차지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남학생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여자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도 읽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아이디어를 낸다. 카카오톡 프로필 메시지를 계속 바꾸며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부디 그녀가 읽길 바라며 ‘사랑했던 모든 순간이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세상에 반이 여자면 뭐해, 네가 아닌데’ 등으로 열심히 바꾼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가 찾아와 “너 글 잘 쓰더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것이다.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다.일반부 우수상을 받은 이수현, 제피 감독의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피로는 주인놈의 저질 체력이다’는 개의 시점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주인은 개를 매번 산책시킬 때마다 힘들어하며 헐떡인다. 주인을 바라보는 개는 “뭐 했다고 힘들어. 이게 힘드냐”고 말한다. 둘이 옥상으로 올라가 쉴 때 개는 박카스를 툭 치며 주인에게 건네준다. “야, 오다 주웠다. 건강 좀 챙겨”라는 내레이션이 흐른다. 주인은 박카스를 마시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 영화제에는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등과 맞물려 직장인들의 피로를 다룬 작품이 다수 출품돼 눈길을 끌었다. 일반인 특별상을 받은 방승환 감독의 ‘휴가라는 이름의 출장’은 휴가철 직장인의 비애를 담았다.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기러 온 한 남자는 쏟아지는 상사들의 카카오톡 메시지에 괴로워한다. “저 휴가입니다”라고 해보지만 메시지는 내용만 바뀐 채 계속 온다. 그래도 기운 차리려 박카스를 꺼내들어 마시는데, 그의 옆에는 바닷가에서도 노트북을 켜고 일하는 또 다른 직장인이 있다. 그는 마시려던 박카스를 주며 위로를 건넨다.
김원호 감독도 직장인의 고충을 다룬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피로는 최고이다’라는 작품으로 일반부 특별상을 받았다. 직장 선후배, 동료로부터 늘 ‘최고’라는 말을 듣고 사는 남자. 그러나 왠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힘겹다. 그는 한강 근처에서 소주를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때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들 힘들지? 늘 최고가 아니어도 된다.” 이 말을 들은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소주 대신 박카스를 집어든다.이날 시상식에는 동아제약 최호진 사장, 김학용 박카스사업부장, 이은석 개발전략실장과 한국경제신문사 김정호 경영지원실장, 박성완 편집국 부국장, 수상자와 가족 등 1100여 명이 참석했다. 축하공연은 ‘시간아 천천히’ ‘RUN’을 부른 가수 이진아가 선보였다. 수상자들에겐 일반부 대상 1000만원 등 총 3000만원의 상금이 돌아갔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