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서양호 서울 중구청장, 운동권→보좌관→청와대→구청장…국민 눈높이서 일하려 노력
입력
수정
지면A17
주민참여 유도할 수 있는 '洞정부'서양호 서울 중구청장(51)은 먹고 마시면서도 거침없는 말을 쏟아냈다. 말과 행동에 모두 ‘열정’이 넘쳤다. 지난 1년간 현수막 사건, 공로수당 논란, 구의회와의 충돌 등 숱한 화제를 뿌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생활문제 해결 선봉장 될 것
그는 지난해 지방선거 전만 해도 중구 구민이 아니었다. 선거를 앞두고 중구를 손바닥 보듯 알 정도로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지금도 매일 오전 5시30분에 면바지에 점퍼를 입고 황학동 중앙시장 곱창골목에 있는 집을 나서 걸어서 출근한다. 구청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전 7시30분. 구청까지는 20~30분 거리지만 가는 길에 만나는 구민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지난 4월부터는 매일 낮에 동 행정복지센터 등에서 구민과의 대화 시간을 가진다. 벌써 100번이 넘었다. 서 구청장은 “왜 아직도 새벽에 걸어서 출근하냐”는 질문에 “구민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했다. “시장 하나를 살리려고 해도 구청장은 자기 인생을 걸고 해야죠. 대충하기는 싫습니다.”서 구청장을 황학동 중앙시장의 장충동한방왕족발에서 만났다. 중앙시장에서는 흔치 않게 손님이 붐벼서 전통시장이 주요 관심사인 서 구청장이 ‘성공 케이스’로 꼽는 가게다. 그는 “주민들에게 잘 알려진 ‘동네 맛집’”이라며 “전통시장이라 3~4인분(2만2000원)이 일반 족발집의 1~2인분(2만6000원)보다도 싸서 서민들이 주로 찾는다”고 설명했다.
계파가 싫었던 비주류 정치인
서 구청장은 1987년 대학에 들어갔다. 숭실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시절 내내 학생운동에 몰두했다. 전국조직인 전국대학생연합에서 정책위원으로 일했다. 학생운동을 접고 정치계로 나선 건 28세 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운동권 인사를 영입하던 시기에 그도 입당했다. “운동권 선배들이 제도권에 출마하는 걸 도와주려고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거기 발을 들여서 4년 뒤인 2000년에 김희선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죠.”
2002년 대통령 선거가 그의 삶을 다시 한번 바꿨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김근태 전 국회의원과 이인제 전 국회의원,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선에 나섰다. 그는 ‘노무현’ 캠프를 선택했다. “그때 운동권은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DJ계는 이인제 전 의원으로 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일종의 카르텔이었죠. 노무현은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어요. 계파에 소속돼 있지 않고, 세력과 자금으로 정치하지도 않았어요. 오직 국민의 눈높이에서 ‘상식과 원칙, 지역주의 반대’라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고작 7~8년 학생운동 했다는 이유로 보좌관 하면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정치를 바꿔보겠다는 사람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된 거죠.”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서 구청장은 청와대 정무비서실 행정관으로 4년을 일했다. 다시 대선을 앞둔 2007년, 그는 청와대를 뛰쳐나왔다. “청와대에서 차기로 계파 사람들을 밀려고 하는 거예요. 국민은 진보정부에 대해 10년 동안 아니라는데…. 보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후보로 뽑아서 혁신하는데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죠. 계파 사람을 내놓고 ‘지더라도 세력을 지키겠다’는 건 유권자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봤습니다.”서 구청장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술이 한 바퀴 돌았다. 왕족발이 접시 가득 담겨나왔다. 족발이 텁텁하지 않고 쫄깃해 술과 궁합이 맞았다. 서 구청장은 “한약재 등의 배합 비율을 맞춘 자체 노하우로 요리해 다른 곳보다 구수한 맛이 난다”고 했다.
현금성 복지 논란 불붙여
지난 1년간 서 구청장에게는 늘 이슈가 따라다녔다. 지난해 7월 ‘그늘막 사건’이 시작이었다. “주민들이 3년째 횡단보도 그늘막이 없다고 민원을 넣었습니다. 저도 인수위 하던 6월 8일부터 그늘막을 설치하라고 지시했고요. 근데 꿈쩍도 하지 않던 구청이 시청 요구 한마디에 6일 만에 시청사 앞에 그늘막을 설치하더라고요. 우리 구민들은 약수역부터 청구역 사이에 70%가 사는데….” 화가 난 그는 그늘막을 뽑아다 구청 앞으로 가져왔다. ‘중구민 여러분 죄송합니다’란 현수막 달고 주민에게 사과했다. 이로 인해 시청과 갈등을 빚었지만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구 인물이 됐다.올초부터는 ‘어르신 복지수당’ 때문에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현금성 복지라는 이유에서다. 어르신 복지수당은 중구가 150억원을 투입해 만 65세 이상 기초생활수급자와 기초연금수급자에게 월 10만원을 지역화폐로 주는 사업이다. 그는 “중구가 어르신 비율이 서울에서 가장 높고, 85세 이상 노인빈곤율도 가장 높다”며 “그들은 가처분소득 10만원도 마련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했다. 지역 특성에 맞게 복지정책을 시행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전국 시·군·구가 현금성 복지를 검증하겠다고 출범시킨 복지대타협특별위원회에 대해 그의 생각을 물었다. “현금성 복지가 만연한 곳은 물론 조정할 필요가 있죠. 정작 전문가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국민총생산 대비 사회복지 비율이 20%인데, 한국은 11%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중구의 노인 자살률이 서울에서 가장 높습니다. 자살률이 높은 것은 빈곤에서 오는 것이고요. 공로수당도 중구가 직면한 노인 빈곤의 현실에서 허리띠를 졸라매 나온 것이지 돈이 남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구가 운영하던 축제의 행사비 25억원과 시설투자비 등을 줄여 재원을 마련했다고 했다. 시설투자도 민간 투자를 받아 복합 개발하겠다는 게 그의 구상이다.
파격적 주민자치 추진
서 구청장은 요즘 매일 3~4시간을 주민들과 만나 자신의 구상과 중구청의 사업계획을 알리는 데 쓰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국공립어린이집 학부모, 초등학교 학부모, 아파트 동대표, 독서모임, 상인회 등까지 열 명이 모여도 간다”고 했다. “반응이 좋아요. 질의응답까지 받으면 길면 90분씩 걸리고요. 내일은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도서관에 학부모들과 다녀오기로 했어요. 도서관 지을 때도 주민학교 열어서 참여시키고 콘셉트 설명하고, 주민 의견 반영하고요. 일 벌이기 전에 주민들 참여시키고 그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관리까지 맡기는 거죠.”
서 구청장은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크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청소 잘해주세요’ ‘무단 주차 많아요’ 같은 생활상의 문제를 많이 얘기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 신뢰를 얻고 비전까지 제시하는 ‘양수겸장’을 해야죠.”
그는 주민 1만5000명을 만날 때까지 강의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1만5000명 중에 고른 5000명을 구청 예산사업에 참여시키고, 그들을 일상적으로 대표하는 50명씩의 동 주민자치회를 조직할 생각입니다. 1만5000명-5000명-750명의 주민 참여 구조를 만들려고 합니다. 바쁜 분들은 온라인 투표도 할 수 있게 하고요.”
“일상생활에 바쁜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느냐”고 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예산과 권한을 주면 무조건 된다”고 했다. “동마다 30억원을 주고 주민 스스로 우리 동네 어디에 쓸지를 정하라고 해보세요. 그러면 ‘어린이집 지어달라’ ‘경로당을 지어달라’는 각종 요구가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예산과 권한을 주는 게 지방자치의 핵심이라고 봐요.”
그는 파격적인 지방자치제를 실행하려고 한다. 동 단위로 생기는 ‘동정부’에 예산편성권과 조직운영권을 넘기는 것이다. 현재 300명 수준인 동 행정복지센터 직원도 900명까지 늘린다. 당장 내년부터 동당 10억원의 예산을 배정하고, 임기 안에 동당 30억~40억원의 예산을 나눠줄 계획이다. 연말에는 동장직선제도 시행한다. “계장 중에서 과장 승진 대상자를 5배수나 3배수로 받아서 동장 시켜줄 테니 그 동에 대한 공약을 가져오라고 하는 겁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모인 주민들이 투표하면 최다 득표자를 제가 임명하고요. 반(半)선출직 동장이죠. 동장한테 시간임기제 직원 추천권을 줄 거고요. 9급 정규 공무원을 줄이고, 예산사업에 참여한 사람 5000명 중에서 발탁해 시간임기제 직원을 뽑도록 할 생각입니다.”
동정부는 국공립어린이집과 경로당 지원 등 생활복지서비스와 공원관리 등 공공서비스를 맡게 된다. 동이 편성한 예산은 구의회와 구청이 심의하면 된다는 게 서 구청장의 생각이다. “지금은 동네 마을 놀이터를 구청이 관리합니다. 그렇지만 담당 과장은 한 달에 한 번도 안 가잖아요. 동에서 관리하면 훨씬 효과적이지요. 예산도 동에서 편성하면 훨씬 더 적재적소에 쓸 수 있다고 봅니다.”
어느새 밤 10시가 다 됐다.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던 서 구청장도 “체력에 한계가 온 것 같다”며 웃었다. “격려하러 온 분들이 ‘초선인데 오전 5시부터 뭐 하는 짓이냐’고 해요. 저는 정치하면서 약속했습니다. 조직·자금 선거는 하지 않겠다고요. 정책으로 승부 보겠다고 생각해 매일 돌아다니면서 ‘공로수당’ ‘동정부’ 등을 생각하고 추진한 겁니다. 사실 메시지와 리더십만 갖고 정치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꿈을 좇는 정치인도 많아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들한테 영감을 주니까요.”
■저녁 8시까지 초등돌봄교실…저출산 우수시책으로 선정
서울 중구가 운영하는 초등돌봄교실이 ‘2019년 지방자치단체 저출산 우수시책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초등돌봄교실은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방과 후 하굣길을 함께하기 어려운 직장인 부모들 대신 돌봄전담사가 초등학생들을 돌보는 정책이다. 지방자치단체 중 돌봄교실을 도입한 건 중구가 처음이다. 중구는 이번 수상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고 특별교부세 1억5000만원을 지원받는다.
중구는 지난 3월 흥인초에 1호 돌봄교실을 마련했다. 저녁 식사도 제공하고, 방학에도 돌봄교실을 운영한다.
다음달엔 봉래초에 두 번째 돌봄교실을 열 예정이다.
■서양호 서울 중구청장 약력
△1967년 경남 창녕 출생
△1987년 숭실대 철학과 입학
△1997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대위 청년특위 부위원장
△2000년 김희선 국회의원 보좌관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대위 전략기획실 메시지전문위원
△2003년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무비서실 행정관
△2016년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2018년 서울 중구청장■서양호 중구청장의 단골집 장충동한방왕족발
9가지 식재료로 삶아 식감이 쫄깃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1호선 동묘역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중앙시장의 메인 골목에 있다. 청계천이 가깝다. 오후 6시만 되면 족발을 포장해서 가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생겨난다.가게 근처에서도 족발 냄새를 쉽게 맡을 수 있다. 특유의 육수로 두 시간 동안 삶아낸 족발의 향이다. 육수는 한약재와 양파, 대파, 마늘 등 아홉 가지 식재료를 넣고 끓여서 준비한다. 손영준 사장은 “육수를 낼 때는 고기 고유의 향을 잘 살려내는지에 주안점을 둔다”고 말했다. 자체 개발한 양념으로 버무린 매운왕족발은 이 집의 별미다. 처음에는 크게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뒤로 갈수록 감칠맛이 깊어지고 불맛도 느껴진다. 여름에는 족발에 해파리냉채와 상추, 오이 등 채소를 곁들인 냉채족발도 판매한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