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일본에 '정신승리'를 거두겠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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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으로 한국 목줄 죈 일본동학 농민군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우금치 전투(1894년)의 결과는 참혹했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1만 명, 최대 3만6000명의 농민군이 목숨을 잃는 동안 일본군 사망자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무기의 차이가 결정적이었다. 동학군의 무기는 대나무 끝을 잘라서 만든 죽창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화승총이 더해졌다. 일본군은 영국 스나이더 소총을 개선한 무라다 소총으로 무장했다. 엎드린 자세에서 한 번 장전으로 1분간 15발을 쏠 수 있었고, 사거리가 800m에 달했다. 화승총은 선 채로 2~3분 걸려야 한 발을 장전할 수 있었고, 사거리는 120m였다.
수모 끊어낼 치열한 전략 절실
그런데 정치권은 '말폭탄'뿐
日 화력에 무너진 동학군의 '주술'
125년 지나서도 되풀이되는가
이학영 논설실장
무기에서 압도당한 동학군은 다른 ‘비기(器)’에 의지했다. 부적과 주문(呪文)이었다. <정감록>에 나오는 ‘궁궁을을(弓弓乙乙: 영원한 생명과 완전무결)’ 구절을 쓴 부적을 태워 마시고, 총탄이 비켜간다는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주문을 외며 돌격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일본의 근대식 신무기는 부적과 주문으로 무장한 동학군의 몸을 꿰뚫었다.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산업공학)는 “일본의 무라다 소총과 조선 화승총은 산업화의 차이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문물을 대한 당시 일본과 조선의 태도가 두 총기에 집약돼 있다는 것이다.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 들어온 화승총을 400년 넘게 쓰고 있었다. 일본은 영국제 최신 소총을 자기들 체형에 맞게 개조했다. ‘이대로’와 ‘더 낫게’의 정신세계는 수탈과 정벌의 엄청난 차이로 이어졌다.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개방 압력에 반응한 두 나라의 차이가 이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의 함대를 받아들여 문호를 개방했지만, 조선은 1866년 프랑스 함대와 싸워(병인양요) 쇄국을 유지했다.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의 혼을 지키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다)’를 내세우며 서구를 배우기 시작했고, 조선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며 유교 전통을 지키는 데 몰두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화혼양재’를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직계이며, 한국 정치권 주류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적 가치관 후예들이라는 사실이 씁쓸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 징용공들에 대한 보상 논란이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제한 조치로 비화하면서 양국 간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아베의 일본 정부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배제하는 초강수를 뒀다. 상당수 한국 기업이 자국산 소재와 부품을 들여오고 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한국 산업의 목줄을 죄고 흔들어대겠다는 속내가 빤하게 읽힌다.일본보다 산업화에서 한참을 뒤진 한국 기업들로서는 날벼락이자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상황을 얼마동안 겪어야 할지 가늠할 수도 없이 일본 정부에 휘둘리는 신세를 면하기 어려워졌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이해찬 대표가 “기업에 추운 겨울이 올 수 있고, 오래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대로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산업 경쟁력 강화와 제조업 혁신을 통해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의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 인사들은 이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실행해나가겠다는 구체적인 설명보다 ‘말 폭탄’ 터뜨리기에 더 바빠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긴급 소집한 국무회의에서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발언한 이후 당정 인사들 사이에서는 ‘전의(戰意) 다지기’ 경연이 한창이다. ‘제2의 독립운동 정신’ ‘경제 임시정부’ 등 조어(造語) 경쟁이 불붙더니 괴담 수준의 ‘일본 폭망론’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쿄에서 방사성 물질이 기준치보다 네 배 초과해 검출됐다”는 블로그에 근거해 “일본 가면 코피 나고 암에 걸린다는 것을 널리 알리겠다”고 목청을 높인 여당 인사까지 등장했다.
일본에 기술력이 뒤처져서 수모를 당하는 일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와신상담의 각오를 진중하게 새겨야 할 판에 벌어지고 있는 풍경은 너무도 참담하다. ‘죽창가’를 125년 만에 소환하고 ‘부적’과 ‘주술’을 외기에 바쁜 후손들을 동학의 원혼(魂)들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