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자랑스런 동문'과 '부끄러운 동문'

이튼칼리지(Eton college)는 영국 엘리트의 산실로 불린다. 역대 총리 55명 중 20명이 이 학교 출신이다.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학계·문화예술계 파워도 대단하다. 이튼 학생을 뜻하는 단어 ‘이토니언(Etonian)’이 사전에 올라 있을 만큼 자부심이 강하다. 대학 진학률은 100%에 가깝고, 그중 3분의 1이 옥스퍼드 등 명문대에 진학한다.

이 학교가 명문대 진학률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은 따로 있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학교 벽면에 1차 세계대전 전사자 1157명, 2차 대전 전사자 74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600년에 가까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과 ‘약자·시민·국가를 위해’라는 교육 철학이 여기에 압축돼 있다. ‘남의 약점을 이용하지 말라, 비굴하지 않은 사람이 돼라, 공적인 일에 용기 있게 나서라’는 교훈도 ‘이튼 동문’의 자랑이다.미국 하버드대는 역대 대통령 8명, 노벨상 수상자 157명 등을 배출한 최고 명문이다. 1636년 설립 이래 하버드의 자랑스러운 동문에는 정치인이 많이 뽑혔지만, 요즘은 ‘맨손 창업 기업인’들로 바뀌고 있다. 학교를 중퇴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가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졸업식 축사를 맡았다.

스탠퍼드대는 학교를 소개할 때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을 창업한 동문들의 이름을 화면에 띄우며 기업가 정신과 도전정신을 특별히 강조한다. 한국 대학이 높은 건물과 장·차관 등을 내세우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나마 올해 서울대가 ‘방탄소년단’ 제작자인 방시혁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 고려대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을 일군 권오섭 엘앤피코스메틱 회장에게 축사를 부탁한 것은 신선한 변화였다.

이런 가운데 ‘부끄러운 동문’ ‘최악의 동문’ 투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에서는 3년 전 ‘부끄러운 인물’을 조롱했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 고려대에서는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현직 주중대사가 최악으로 꼽히고 있다. 둘 다 현 정권의 실세라는 점에서 여론의 흐름을 보여주는 단면이지만, 어쩌다 ‘자랑’이나 ‘존경’보다 ‘부끄러움’이나 ‘최악’을 꼽는 데 더 열을 올리는 세태가 됐는지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