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CEO 되는 순간 '315개 형사처벌' 대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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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칙 88%가 대표이사 겨냥공정거래법 산업안전보건법 화학물질관리법 등 10개 경제·노동·환경법에 규정된 357개 벌칙조항 가운데 315개가 법 위반 당사자뿐 아니라 관리감독 책임을 물어 사업주(대표이사)에 대한 형사처벌 근거를 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상당수는 직원 수만 명을 지휘하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현실적으로 챙기기 어려운 사안이란 점에서 과잉 규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산안법에 괴롭힘 금지법까지
수만명 직원 관리하는 CEO가
일일이 못 챙겼다고 '과잉 처벌'
11일 한국경제신문이 한국경제연구원에 의뢰해 상법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파견법 산업안전보건법 화학물질관리법 대기환경보전법 화학물질등록평가법 등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치는 10개 법률의 벌칙조항을 전수조사한 결과 88.2%가 양벌(兩罰)규정 등을 통해 사업주를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조사됐다.경영계는 수많은 경영 판단을 해야 하는 CEO에게 과도한 관리감독 책임을 지운다는 점에서 ‘과잉 범죄화’(범죄가 아닌 걸 범죄화하거나 잘못에 비해 처벌 수위가 과도한 것)라고 호소한다. 가해자가 아니라 사업주만 처벌하는 규정이 마련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76조)이 대표적인 예다. 괴롭힘 피해자나 신고자에게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한 CEO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을 받게 된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원청업체의 안전조치 소홀로 하도급업체 직원이 사망하면 원청업체 CEO가 최대 7년 동안 ‘옥살이’를 하도록 했다. 이는 힘을 이용해 부하직원을 간음한 사람에 대한 처벌 수위(형법 303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와 같다.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신사업 투자, 인수합병(M&A) 등 미래 사업 발굴에 집중해야 할 CEO들에게 세세한 사안까지 관리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건 국가적인 손실”이라며 “CEO에 대한 형사적 제재를 법인에 과태료를 매기는 방식의 경제적 제재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부장이 사원 괴롭혀도, 하청 직원 다쳐도…'교도소 담장' 걷는 CEO들
“제가 피고인 형사재판과 고소·고발 건수를 합치면 10건 정도 됩니다. 수만 명의 직원을 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왜 이건 안 챙겼냐’며 관리·감독 책임을 물으니 어쩌겠습니까. 다른 대기업도 마찬가지예요. 대한민국 대기업 CEO는 ‘이미 전과자’거나 ‘잠재적 범법자’ 둘 중 하나예요.”
국내 굴지의 한 대기업 CEO는 최근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털어놨다. 과도한 형사처벌 리스크가 CEO의 기업가정신을 위축시켜 새로운 도전보다 사고 관리에 더 신경쓰는 ‘수비형 CEO’를 양산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사그라드는 경제활력을 되살리려면 규제 완화와 함께 CEO에 대한 ‘과잉 범죄화’부터 없애야 한다”(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2000개에 육박하는 CEO 처벌조항
CEO 처벌규정에 대한 재계의 불만은 크게 ①형사처벌 조항이 너무 많고 ②관리 책임 범위가 너무 넓으며 ③처벌 수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재계가 추정하는 CEO 처벌조항은 2000개에 달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이 공정거래법 등 10개 법률을 전수 조사해 확인한 CEO 처벌조항(315개)보다 훨씬 많은 규정이 자본시장법 등에 산재해 있다는 얘기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014년 86개 경제·노동·환경법을 조사한 결과 CEO 형사처벌 조항이 1837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후 여러 법에서 CEO 처벌조항이 추가된 만큼 현시점엔 2000개에 육박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CEO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건 ②번이다. 큰 문제에 집중해야 할 대기업 CEO와 오너에게 너무 넓은 관리 책임을 물어서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도 그랬다. 검찰은 2016년 카카오가 계열사 5개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 의장을 기소했다. 계열사 감사로 일하는 사람이 설립한 자산 규모 5300만원짜리 골프연습장 등을 누락한 책임을 김 의장에게 물은 것이다. 담당자가 누락 사실을 알고 자진 정정했지만 소용없었다. 법원은 지난 5월 1심에서 “김 의장이 고의로 누락했다고 보기 힘들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검찰은 항소했다.
기업인들은 ③번도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연간 100㎏ 이상 제조·수입한 신규화학물질을 등록하지 않은 사업주에 대한 처벌(징역 5년 이하)이 업무상 과실로 사람을 죽게 한 경우(형법 268조)나 불법 감금·체포(형법 276조)와 같은 건 지나치다는 얘기다.
‘수비형 CEO’ 양산…기업가정신 위축
CEO에 대한 과잉 범죄화는 과잉 규제와 함께 국내 투자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화학업체가 국내에 공장을 지으려면 선진국보다 훨씬 깐깐한 경제·노동·환경법을 지켜야 한다. 직원이 실수를 해도 함께 처벌받을 수 있는 CEO로선 리스크 덩어리인 국내 공장 신축이 부담일 수밖에 없다. “현행법은 CEO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라’는 기업가정신이 아니라 ‘사고 터지지 않게 관리 잘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최 교수)는 지적이 이래서 나온다.
상당수 전문가는 CEO가 적극적으로 법을 위반했거나 중대 과실을 범했을 때만 형사처벌하고 나머지는 법인에 과태료를 매기는 방식의 ‘경제적 제재’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총 관계자는 “부당노동행위 등 일종의 사인 간 거래는 미국 등 선진국과 같이 민사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배임죄 등 ‘걸면 걸리는’ 모호한 법규정도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현행 배임죄는 법규정이 명확하지 않은 탓에 CEO가 정상적인 경영 판단을 했더라도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히면 처벌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며 “경영 판단에 형사책임을 물으면서 적극적인 투자를 기대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오상헌/서민준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