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일 아닌 공휴일 돼버린 광복절, 해 갈수록 씁쓸"

고 최윤봉 애국지사 아들 최경식 옹, 광복절 앞두고 안타까움 토로
최 지사, 울산 언양 3·1 운동 주도해 옥고…중국 망명 중 36세에 생 마감
최근 한일관계에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말고 냉철히 대응하며 우리 실력 키워야" 조언
"매년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는데, 씁쓸한 마음은 해가 갈수록 커집니다. '국경일이 아니라 그저 공휴일이 됐구나'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
독립운동가 고(故) 최윤봉(본명 최해선) 애국지사의 아들인 최경식(89) 옹은 이제 광복절이 반갑지 않다고 토로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일부 관련 단체만의 국경일이 됐다는 느낌이 점점 짙어져서다. "1시간짜리 기념식이 끝나면 광복절의 의미를 생각해 주시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부 후손만 모여서 그 의미가 퇴색될까 봐 전전긍긍하죠. 고층 아파트만 봐도 내걸린 태극기를 찾아보기 어려워졌어요.

"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광복회 울산지부 사무실에서 최옹을 만났다. 그의 선친은 1919년 울산 언양 3·1 운동을 주도한 최윤봉 지사다.

최 지사는 3·1 운동이 지방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지자, 언양장이 서는 4월 2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당시 22세였던 최 지사는 만세운동을 앞둔 3월 29일 밤, 당시 ///상남면사무소에서 등사기를 가져와 독립선언서를 찍었다. 태극기는 한지에 그려 대나무로 손잡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태극기는 장에 내다 파는 장작 속에 숨긴 뒤, 소달구지에 실어 장으로 옮겼다.

4월 2일 오전 언양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준 뒤, 시장 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최 지사는 이 일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최경식 옹의 아버지뿐 아니다.

그의 큰아버지 최해규, 둘째아버지 최해식, 고모부 이규장, 외삼촌 이규로 등이 모두 언양 3·1 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큰아버지인 최해규 지사는 당시 천도교 울산교구 초대 회장으로, 언양 3·1 운동 중심에 섰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대구형무소 복역 중 간수를 매수해 탈옥했고, 이후 가족과 함께 중국 만주지역으로 망명을 떠났다.

최경식 옹의 선친도 석방 후 일제 탄압을 피해 중국 봉천(현 랴오닝성 선양)을 거쳐 안동(랴오닝성 단둥)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1934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하고 만다.

수감 생활의 후유증에다 망명 생활의 고단함으로 병을 얻어 돌아가신 것으로 최경식 옹은 추측하고 있다.

"예전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보면, 일제가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를 숨겨준 한족 마을 주민을 몰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묘사가 과장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산 채로 잡아 오든, 시신으로 가져오든 막대한 보상금을 줬어요.

망명 생활은 혹독하고 처참할 수밖에 없었죠."
네 살에 아버지를 여읜 최경식 옹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작은 일화가 전부다.

"안동의 야시장에 가는 길에 내가 아버지 손을 잡았는데, 아버지가 손을 빼는 장난을 치면서 웃으셨다고 해요.

제 기억에는 없는, 아버지와의 유일한 추억이죠."
최경식 옹은 광복이 되어서야 가족과 함께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 밟는 조국의 땅이었다.

최경식 옹의 큰형이 선친의 유골을 가져왔고, 이후 유골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선친에게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마지막으로 최근 극으로 치닫는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최경식 옹은 조언을 잊지 않았다.

"5천만 대한민국 국민 중에 지금 일본이 보이는 행태에 앙갚음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말고 이성을 찾아야 합니다.

큰 나라인 중국도 한때 '도광양회'(韜光養晦·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운다) 전략을 앞세우지 않았습니까. 냉철하게 대응하면서 우리 실력을 키워나가야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