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락원은 황윤명이 1884년 이전에 조성한 정원"

국회서 23일 명승 성락원 토론회
실존하지 않은 인물인 '조선 철종 대 이조판서 심상응'이 소유했다고 알려져 부실 고증 논란에 휘말린 성북구 성락원(명승 제35호)은 황윤명이 1884년 이전에 조성한 정원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의원이 23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하는 '성락원 명승지정,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발제자인 이원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성락원 조성 과정에 대해 발표한다.

이 연구사 발표는 지난 5월 문화재청이 성락원 역사를 고증하겠다고 언론에 알린 뒤 사실상 처음으로 내놓는 견해다.

22일 배포된 발제문에 따르면 이 연구사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춘파유고'에 수록된 시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가 성락원 영벽지 바위 글씨와 일치한다는 점을 근거로 성락원이 황윤명 별서(別墅)라고 설명했다. 황윤명은 고종을 모신 내관으로, 호가 춘파(春播)다.

그의 문집인 춘파유고에 실린 서문에는 김문연이 "춘파의 풍류는 드넓고 빼어나고, 시명이 대단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고 적은 문장이 있다.

이 연구사는 조성 시점에 대해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혜화문을 나가 황윤명 집을 피난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조선 후기 정원이 맞는다고 밝혔다. 그는 후대에 붙인 정원 명칭인 성락원을 대체할 만한 용어로는 춘파유고에 등장하는 쌍괴당(雙槐堂), 쌍괴누옥(雙槐陋屋), 쌍괴실(雙槐室)을 제안했다.

쌍괴당은 황윤명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연구사는 영벽지 일원에 새긴 글씨 6점은 같은 시기 작품이 아니라 정원 조성 이전부터 개별적으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두 차례에 걸친 전문가 회의에서 성락원이 황윤명이 별서를 조성하기 전에도 경승지였다는 점이 확인됐기에 명승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국여지비고와 채제공이 쓴 '유북저동기' 등을 보면 조선 후기에 성북동은 복사꽃이 만발하는 도성 내 유람처였다는 사실도 제시했다.

토론회에서는 이 연구사 발표에 이어 본격적인 토론이 벌어진다.

좌장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맡고, 박한규 문화재청 문화재보존국장과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 정기호 전 문화재위원, 이기환 경향신문 기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이영이 상명대 박사 등이 참가한다. 참가자들은 고증이 미흡했고, 문화재 지정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성락원의 명승 지위 유지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