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미아 종료] 靑 '외교해법 외면한 日 안보신뢰 깼다' 판단

"'한미동맹 문제없다' 자신감 속 국민감정까지 고려해 결정한 것"
한일 우호협력 회복 시 지소미아 회복 등 관계복원 길 열어둬
'한미일 공조 균열 불가피' 우려·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영향 주목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결단한 것은 무엇보다 일본의 태도에서 한일 갈등을 해결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문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와는 별개로 한일 간 미래지향적 관계 수립을 위해 외교적 해결의 손길을 내밀었음에도 일본이 전혀 성의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자 협력을 유지할 신뢰가 깨졌다고 본 것이다.

일본이 지난달 반도체·디스플레이 3대 핵심소재 수출 규제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정부 내에서는 지소미아를 유지하자는 쪽의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과거사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지향한다는 우리 정부의 '투트랙' 기조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청와대는 그 전부터 악화하는 한일 관계를 풀고자 6월 말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해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타진했다.

일본이 3대 핵심소재 수출 규제를 발표한 뒤로도 특사를 파견하는 등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손길을 내밀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이달 2일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인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추가 보복으로 응수했다.
이후 거듭 대화를 제안한 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도 화답하지 않고, 21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가 이어지자 마침내 청와대도 초강수를 뒀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부는 일본의 행위가 한국을 안보 우호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한일 안보협력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인식했다"며 "미래 협력의 진전을 어렵게 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감한 군사 정보를 상호 교환하는 것은 우방국 간 안보협력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부연했다.청와대는 이처럼 신뢰를 저버린 행위가 거듭되는 상황에서 일본에 더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더는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국가의 이익을 고려할 때 명분도, 실리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 이런 분석을 뒷받침했다.

애초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해 지소미아 종료를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때 이를 우려하는 측에서는 한미일 3국 공조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작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지난달 중국·러시아 군용기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무단 진입에 이어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북중러가 일종의 무력시위로 단일 대오를 형성하는 분위기에서 한미일 공조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소미아 종료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받을 때부터 청와대는 일본과의 안보협력 중단이 미칠 영향을 면밀히 검토했고 이에 따라 실리적으로도 잃을 게 많지 않다는 자신감 속에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배경에는 상황을 악화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외교적 합의를 당부한 미국의 제안을 일본이 거부한 만큼 한미일 공조 균열의 책임은 오히려 일본에 있다는 논리를 통해 '명분 싸움'에서도 불리할 게 없다는 판단도 깔린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백악관 기자들과 만나 "나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잘 지내기를 바란다"면서 "그들은 동맹국이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미 동맹에 문제가 없다는 확신 역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가능하게 했던 주요한 요인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일 간 문제로 한미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안보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만큼 지소미아와 관련해서는 미국과 거의 실시간으로 소통했다"며 "일본의 반응이 없다면 지소미아 종료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우리 정부의 이번 결정을 이해하고 있다"면서 "지소미아 종료와 별개로 북한 핵 문제를 포함한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한미 간 협력 및 동맹의 기반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으로 지소미아가 한국에 가져다주는 실익이 크지 않다는 점도 청와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일본이 우리 측에 제공한 군사 정보의 질이나 효용성은 말씀드릴 수 없으나 최근 정보교류 대상은 감소 추세였다"면서 "지소미아가 체결된 2016년 11월 이전에도 한미일 3국 간 군사정보 교환은 이뤄졌다"고 언급했다.

청와대는 지소미아 종료라는 초강수를 꺼내 들면서도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협력을 위한 관계 회복의 가능성은 열어뒀다.

청와대 관계자는 "일본이 부당한 보복을 철회하고 한일 우호 협력이 회복되면 지소미아를 포함한 여러 조치는 재검토될 수 있다"고 밝혔다.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논의하되 미래지향적 협력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투트랙'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청와대의 이런 자신감 있는 태도에도 한미일 공조를 우려하는 여론이 완전히 사그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마크 에스퍼 신임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9일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의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지소미아가 한미일 안보협력에 상당히 기여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가 '미국이 이해했다'고 전하기는 했으나, 지소미아 종료의 영향을 미국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다.아울러 한반도 비핵화를 넘어 동북아 평화를 안착시킨다는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구상에 미국은 물론 일본의 협력 역시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결정에 따른 한일 갈등 심화는 청와대가 풀어야 할 숙제라는 평가도 나온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