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순간의 삶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필멸(必滅)이란 운명은 인간 문화와 문명의 기반

배철현 박사의 인문학 산책 -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23) 필멸(必滅)
핀란드 화가 악셀리 갈렌 칼레라의 1897년 작 ‘렘민카이넨의 어머니’(108.5×85.5㎝). 달걀 노른자, 벌꿀, 무화과즙 등을 접합체로 쓴 템페라를 사용한 그림. 헬싱키 아테네움미술관 소장. 신화 속 영웅 렘민카이넨이 사망한 뒤 그의 어머니가 훼손된 아들의 시신을 꿰매고 난 장면을 피에타 스타일로 그렸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활시킬 우코 신의 전령인 벌을 기다리고 있다. 프로이트는 안티고네가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해 정성스러운 장례를 치른 행위를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해석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다르고, 사물과 다른가. 고대 히브리인은 인간을 ‘아담(adam)’으로 불렀다. ‘아담’이란 단어는 고대 히브리어로 ‘붉은 흙’이라는 의미다. 토기장이는 흙을 빚어 원하는 그릇을 만든다. 이때 사용하는 가장 질 좋은 흙이 바로 ‘붉은 흙’이다. 농업이나 포도주를 재배하기 위한 가장 질 좋은 흙도 ‘붉은 흙’이다. 이 의미를 지닌 ‘테라 로사(terra rosa)’라는 라틴어 표현은 최적의 농산품과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한 흙이다.

인간붉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마치 그릇이 각각의 용도가 있듯이 일생을 통해 반드시 이뤄야 할 자신만의 고유한 임무가 있다. 인생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이 그릇을 매일 닦고 그 안에 하루라는 시간을 담는 연습이다. 그런 인간은 언젠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죽음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죽음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 통과의례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쾌락에 탐닉하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세상의 덧없음에 경도돼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인류는 자신의 필멸성을 깨닫고 나서 비로소 순간의 삶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 노력이 인간의 문화와 문명의 기반이다.

길가메시 서사시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제도 인간의 필멸성이다. 길가메시는 자신의 단짝이자 ‘제2의 자아’였던 엔키두가 신들의 저주를 받아 죽자, 죽음을 실제로 극복하기 위해 지하세계로 여행한다. 그곳에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영생을 살고 있는 유일한 존재 ‘우트나피슈팀’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우트나피슈팀과 그의 아내는 지상에서 인간들이 떠드는 통에 밤에 잠잘 수 없는 신들이 홍수를 내려 인류를 몰살하려는 계획을 몰래 들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방주를 제작해 살아남았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 방주 이야기의 원형이다.길가메시는 천신만고 끝에 우트나피슈팀을 만나 영생의 비결을 묻는다. 우트나피슈팀은 말한다. “죽음은 인간의 일부다. 품안에 있는 아내, 무릎 위에 있는 아이를 보고 즐거워해라. 항상 몸과 옷을 깨끗하게 하고 좋은 음식을 즐겨라. 이것이 인간이 할 일이다.”

순간을 사는 인간은 ‘지금 여기’에만 관심을 가지고 즐기라고 조언한다. 인간은 현재를 즐기기 위해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죽음을 기억하는 문화’인 장례를 가장 중요한 의례로 여겼다. 정교하고 감동적인 장례를 통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과 인생의 덧없음을 확인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상징인 피라미드는 아직도 우리에게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기념물이다. 인생은 잘 죽기 위해 매일매일 사는 연습이다. 장례문화는 인간을 인간답게, 순간을 사는 인간을 영원히 사는 신적인 인간으로 훈련시키는 의례다.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29년 《문명 속의 불만(Das Unbehagen in der Kultur)》이란 책에서 개인의 자유와 욕망은 사회의 기대와 규범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문명과 개인의 근본적인 갈등은 개인과 문명이 추구하는 지향점의 차이에서 온다. 개인은 본능과 자유를 추구하지만, 문명은 그 반대로 본능의 억압과 순응을 요구한다.

테베의 왕 크레온은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구축하면서 가장 비문명적인 행위를 자행하려 한다. 그는 인간 문명의 축인 ‘장례’를 조절해 권력을 강화할 셈이다. 크레온은 테베라는 도시를 원수 도시 아르고스의 장군들과 침공해 파괴하려고 시도한 폴리네이케스를 인간 이하의 동물로 여긴다. 크레온은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린다. “아무도 폴리네이케스를 위해 장례를 치르거나 애도하지 말라.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버려 둬라. 새 떼와 개 떼의 밥이 되고 흉측한 몰골이 되게 하라.” 이 무자비한 칙령은 인간과 동물의 죽음 구별에서 출발한 인간 문명의 파괴다.

‘진수성찬’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쎄사우로스(thesauros)’는 원래 인간이 신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제물이다. 크레온의 칙령은 인간이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이룩한 거룩한 의례를 가장 천한 짐승이 파헤치도록 허용한 명령이다.크레온은 이런 반인류적인 명령에 대해 “이것은 내 의도다”라고 말한다. ‘의도’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프로메나(phronema)’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키는 지적인 능력이자 의지다. 크레온의 주문은 이전에 인용된 안티고네의 말보다 더 잔인하다. 안티고네는 ‘새 떼’만 언급했지만, 크레온은 ‘개 떼’를 첨가해 야만성을 더한다. 테베 시민들은 그렇게 비참하게 사라지는 폴리네이케스의 ‘흉측한 시신’을 ‘관람’할 것이다.

흉측한 시신은 비문명이자 반문명이다. 호메로스의 마지막 책인 《일리아스》 24권에서 영웅 아킬레우스가 친척이자 절친인 파트로클레스를 죽인 헥토르를 결투에서 살해한 후 시신을 훼손하려 하자 제우스 신이 개입한다. 결국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시신을 돌려받았다. 이 비극에서 크레온은 인간 문명의 상징인 의례를 흉측하게 만들 셈이다.

■기억해주세요
인생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이 그릇을 매일 닦고 그 안에 하루라는 시간을 담는 연습이다. 그런 인간은 언젠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죽음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죽음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 통과의례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 인류는 자신의 필멸성을 깨닫고 나서 비로소 순간의 삶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 노력이 인간의 문화와 문명의 기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