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프랑스의 태양과 피레네산맥이 빚은 루시용 '신의 물방울'

여행의 향기

나보영의 '걸어서 와인 속으로' - 프랑스 루시용
다양한 맛과 향의 와인이 생산되는 프랑스 루시용의 포도밭 풍경. 도멘 카즈 제공
웬만한 프랑스 와인 산지를 돌아보고 난 뒤 루시용(Roussillon)에 갈 기회가 생겼다. 프랑스 와인 생산지에 관해 기본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남쪽 끝 변방일 거라고만 생각한 곳에 그렇게 다양하고 훌륭한 와인이 있었을 줄이야! 피레네산맥과 지중해를 품고 스페인과 맞닿은 루시용은 과거에 카탈루냐의 영토였다. 지금도 카탈루냐인의 피가 흐르고, 언어가 통하며, 곳곳에 문화가 스며 있다. 사람들의 성향도 유독 열정적이고 정이 넘친다. 그 색다른 매력에 푹 빠져서 루시용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샅샅이 훑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곳을 탐색하며 보석 같은 와인을 캐내는 마음으로!
'석류석 빛깔' 샤토 발미 루즈…지중해 노을에 취하다

태양이 만든 마법 같은 와인, ‘뱅 두 나튀렐’
루시용의 와인에 대해 얘기하자면, 먼저 뱅 두 나튀렐(Vin Doux Naturel)이라는 것이 있다. 당도가 무르익도록 늦게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빚은 뒤 알코올을 첨가해 도수를 높게 하는 주정강화 와인이다. 명산지로는 리브잘트(Rivasaltes), 바뉠스(Banyuls), 모리(Maury) 등이 꼽힌다. 방식에 따라 투명한 유리 항아리에 담아 뜨거운 태양 아래에 줄지어 놓고 산화시켜 완성하는 경우도 있다. 몽테스코(Montescot)에 자리한 샤토 드 루(Chateau de l’Ou)에서 그 광경을 직접 마주하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가끔 ‘와인을 만드는 것이 연금술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순간이었달까. 이렇게 만든 와인들은 호박석이나 석류석 보석의 광채를 띠며 커피, 카카오, 호두 껍질, 말린 자두 향이 그윽하다. 샤토 드 루에서는 주정강화 와인뿐만 아니라 뛰어난 드라이 와인도 생산된다. 이 덕분에 루시용 정통 요리에 골고루 매칭해볼 수 있었다. 숯의 잔열에 천천히 익힌 달팽이 요리 에스카르고, 언뜻 보기엔 스페인식 볶음밥인 파에야 같지만 쌀 대신 잘게 자른 볶음 국수가 들어 있는 피데와, 장작에 구워낸 빵과 일종의 갈릭 버터인 알리올리 등은 맛도 좋고 흥미롭기까지 했다. 루시용 여행의 시작이 호기심으로 가득해질 수밖에 없었달까.

피레네산맥과 지중해를 품은 전망루시용의 대표적 레드 와인 품종은 그르나슈다. 보통 무르베드르, 시라 등의 품종과 블렌딩하곤 한다. 코트 뒤 루시용(Cotes du Roussillon) 마을에 자리한 샤토 발미(Chateau Valmy)에서 마신 와인들의 풍미가 지금도 생생하다. 이 와이너리는 외관부터 남달랐다. 1888년 지어진 성이 하얗게 빛나며 서 있고, 주변은 온통 푸른 숲과 해안과 포도밭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그 안의 호텔은 피레네산맥과 지중해를 전망으로 품은 데다 근사한 화강암으로 된 수영장까지 갖췄다.
와이너리 레스토랑의 드넓은 테라스에서 오후 햇살을 누리며 와인을 마셨다. ‘과하지도 직설적이지도 않은 그르나슈’라고 일행들은 입을 모았다. 전통적인 루시용 그르나슈는 맛이 짙고 강한 편인데, 좀 더 부드럽고 우아했다. 그 비밀은 탄소 침용(Carbonic Maceration) 방식으로 발효한 것에 있었다. 탄소 침용이란 포도 알을 으깨지 않은 상태에서 발효탱크에 이산화탄소를 넣고 발효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 방식을 쓰면 타닌이 적게 추출되고 밝은 색을 띠게 되며 신선한 과실 풍미가 잘 표현된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맛을 몰랐겠구나 싶었다. 포도밭 너머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누군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감미로운 와인에 취하기라도 한 듯이.

로제 와인의 대발견! 그르나슈의 풍미와 색깔루시용을 여행하며 또 하나 발견한 게 있다면 그르나슈로 만든 로제 와인의 매력이다. 일행 중 한 명이 ‘그르나슈는 포도 껍질이 도톰하고 빛깔도 진해서 뛰어난 풍미와 색을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보다'라고 했는데 그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몽테스코 샤토 드 루의 와인 저장고.
스페인 국경에 인접한 생 장 라세(Saint Jean Lasseille)에 자리한 샤토 플라네르(Chateau Planeres)의 로제 와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와인의 이름은 ‘샤토 플라네르 프레스티지 로제(Chateau Planeres Prestige Rose)’. 그르나슈를 포함한 세 가지 적포도 품종을 발효 탱크에 침용시켜 적당한 색이 우러났을 때 짜낸 즙으로 만든다. 침용 과정에서 껍질과 씨로부터 깊은 색과 풍미를 얻을 수 있어 다수의 로제 와인이 이런 방식으로 탄생된다. 프랑스어로 세니에(Saignee) 방식이라고 하는데, 사전적으로 사혈(瀉血)을 뜻해서 흔히 ‘사혈법’이라 부른다. 적절한 사혈로 얻어낸 신선한 첫 맛과 입안의 부드러움과 긴 여운에 반해 여러 잔을 비웠다. 장밋빛과 대조를 이루는 에메랄드 컬러의 네오 클래식풍 레이블 또한 무척 예뻤다. 화이트 와인과 나란히 두 병을 모아 누군가에게 선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까지 다른 지역의 로제 와인만 마셔봤다면 프랑스 남부, 이왕이면 루시용의 로제 와인을 꼭 마셔보시길.

집 한 채 빌려 살고 싶은 마을, ‘바뉠스’와 ‘콜리우르’생 장 라세에서 남동쪽으로 약 30㎞를 차로 달리면 짙푸른 해변을 만나게 된다. 남쪽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 북쪽으로 프랑스 몽펠리에를 두고 자그마한 해안 마을들이 웅크리고 있다. 먼저 등장하는 마을 콜리우르(Collioure)는 피카소, 마티스, 앙드레 드랭 등의 화가가 즐겨 찾으며 그림을 그렸던 마을이다. 좁은 골목들을 지나 콜리우르의 짙푸른 해변을 마주했을 때는 ‘프랑스에서 콜리우르의 파란 하늘 같은 하늘은 없다’던 마티스의 말이 눈으로 실감됐다. 누군가 가장 짙고 예쁜 파랑을 구해다 열심히 풀어놓은 것처럼 선명하고 파랬으니까.
루시용 대표 와인 여행 코스인 도멘 카즈를 이끌고 있는 4세대 에마뉘엘 카즈.
그 파랑을 닮은 색으로 예쁘게 칠해놓은 와이너리 레 클로 드 폴리(Les Clos de Paulilles)에 들렀다. 오렌지색 타일 위에 지어진 파란색 건축물을 사이에 두고 포도밭과 바다가 나란히 마주 보고 있었다. 와이너리 마당의 식당에서는 카탈루냐 해산물 요리의 향연이 한창이었다. 거기서 점심을 먹고 있노라니 흐르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좋았다. 이런 곳에 집 한 채 빌려서 한 계절 보내고 싶다는 꿈을 꿔볼 만큼이나.

콜리우르의 남쪽 바뉠스는 좀 더 작고 조용한 마을이다. 바뉠스의 포도밭들은 어지러울 정도로 가파르고 좁아서 등장하는 족족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계가 들어갈 수 없으니 손으로 거의 모든 밭일을 해내는데, 뜨거운 태양을 뒤에 업고 일하는 모습에 경외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포도밭 아래로 등장한 해변에는 관광객은 별로 없고 주민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가 돼 신발을 벗고 자박자박 모래밭을 걸었다. 그러다가 땀을 식히러 소규모 와인 생산자들의 와인 양조장에 들렀다. 대체로 자그마한 와인 숍을 운영하고 있어서 동네 사람은 물론 여행자도 들러 와인을 맛보고 사가기 좋다. 그 마을에선 해변에서도, 와이너리에서도, 식당에서도 외부인과 현지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일상이 겹치곤 했다.루시용에는 그 밖에도 와인을 따라 여행하기 좋은 곳이 많았다. 루시용 관광 열차가 지나는 곳에 있는 튀뱅 칼베(Thunevin Calvet), 근사한 부티크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도멘 카즈(Domaine Cazes), 수세기 된 건축물과 와인저장고가 멋스러운 도멘 드 롬보(Domaine de Rombeau) 등 파헤칠수록 무궁무진했다. 그러니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좋은 눈을 가진 여행자들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이 먹고 마시고 색다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미개척 여행지라는 것을!

루시용=글·사진 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