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관주주의 경영간섭 우려하는 'BRT 선언'

"美 CEO들이 선언한 '회사 목적'
'회사가치=주주가치' 퇴조 아닌
기관주주 단기주의에 대한 경고"

황인학 < 한양대 특임교수·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 지난달 19일 ‘회사의 목적에 관한 선언’을 발표했다. BRT는 회원사 시가총액이 미국 기업 전체의 20%에 달하는 미국 최대 경영자단체다. 선언문은 300단어로 짧지만 메시지는 분명하다. 회사의 기본 경영방침을 ‘주주 중심’에서 ‘이해관계자 중심’으로 선회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고객에게 기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종업원에게 공정한 보상 및 교육훈련을, 협력사에 공정하고 윤리적인 거래를, 지역사회에는 공동체 가치와 환경 보호를 약속하고 있다. 주주가치는 마지막에, 그것도 ‘장기적’이란 수식어를 달고 언급했다.

이 선언에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간체이스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CEO, 팀 쿡 애플 CEO 등 미국 대기업 CEO 181명이 동참했다. 이들은 정말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하려는 걸까. 기업 지배구조는 정답이 없고, 이를 규율하는 법제도는 나라마다 다르다.한국 제도의 관점에서 보면 BRT 선언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고객감동 경영은 식상할 만큼 들어왔고, 종업원 보호와 노사 공동의 이익 증진은 노동법상 한국만 한 데가 없다. 협력사 거래에도 상생협력법, 하도급 공정화법 등으로 정부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한국 상장사는 주주 외 이해관계자를 중시한다는 선언을 굳이 하지 않아도 법 제도상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미국은 다르다. 미국은 ‘주주 우선주의’ 전통을 견지해왔다.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며 경영자는 주주를 위해 충실의무를 다해야 하는 대리인이다. 회사의 유일무이한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프리드먼 독트린(Friedman Doctrine)’에서 보듯이 미국은 회사가치를 주주가치와 동일시해 왔다. 주주가치 극대화는 다른 이해관계자 이익과 상충하지 않는다고 여겨 왔다. 이런 맥락에서 BRT 선언은 미국 전통의 기업지배구조 이론과 실무에 반한다. 심하게 말하면 전문경영인 중심의 경제단체가 주주의 권리를 제한하겠다며 반기를 든 격이다.

내용도 그렇고 서명한 CEO들의 면면도 그렇고, BRT 선언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계기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도래한다고 전망하는 것은 성급하다. 기업지배구조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이 강한 데다, BRT의 속내도 달리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이 주도해 지난해 10월 발표한 ‘상식적 기업지배원칙 2.0’을 보자. 이 원칙은 BRT 선언과 달리 주주 우선주의 전통하에 주주에 대한 책임경영을 강조한다. 이 원칙에 서명한 CEO 중 3분의 1은 BRT 선언 서명자와 동일하다.BRT가 이해관계자 가치를 내세운 진짜 속내는 ‘기관주주의 단기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기관주주 비중은 70%대로 높지만 주식보유 기간은 평균 6개월 미만으로 짧다. 단기 주주는 회사의 미래가치 제고를 위한 활동보다 당장의 고(高)배당을 선호한다. 단기간에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기관주주들이 자사주 매입·소각, 유상감자, 자산매각·특별배당 등을 압박하는 사례는 확산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CEO의 65%가 중장기 경영전략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기관주주 행동주의’는 미국 경영계의 눈엣가시다. BRT가 2016년 보고서에서 ‘주주는 모든 주주를 위해 장기적 가치 창출 목표에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하며, 이런 책임감 없이 추가적인 권리를 요구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문제인식 때문이었다.

결국 BRT 선언은 장기적 가치창출을 위한 경영을 하는 게 모두에게 바람직하니 기관주주는 단기주의 경영압박을 자제하라는 메시지다. ‘주주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자는 기관주주다. 기관주주 행동주의는 음식의 소금처럼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기관주주의 경영 관여가 지나치면 BRT 사례에서 보듯이 주주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제 발등 찍기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