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손모빌 베트남 10조 가스전 철수설…현대, 포스코 등 韓 건설사에 불똥튀나 [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까버이산(Ca Voi Xanh)은 베트남 중부 해안에서 동쪽으로 88㎞ 가량 떨어진 대륙붕이다. 약 1500억 입방미터(ft3)의 가스가 매장돼 있는 베트남 최대 가스전이다. 2017년 1월 엑손모빌이 페트로베트남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개발에 뛰어들었다. 총 사업비 규모만 100억달러(약 12조원)에 달한다. ‘푸른 고래’라는 뜻을 갖고 있어 ‘블루웨일’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미·중 갈등의 암운이 몰려들고 있다. 엑손모빌이 중국의 압박으로 인해 철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설(說)이 돌고 있어서다. 블루웨일 가스전 사업은 우리 기업과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현대건설, 대우건설, 포스코건설, 롯데건설, 두산중공업 등이 발전소를 짓기 위해 수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엑손모빌 철수설은 이달 초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석유시장 분석가인 팀 다이스가 “베이징은 남중국해에서 엑손모빌을 쫓아낼 것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베트남 내에선 좀 더 구체적인 풍문이 등장했다. 후이죽이라는 독립 블로거에 따르면 엑손모빌이 블루웨일 가스전 지분 64%를 매각하겠다는 계획을 8월28일 베트남 정부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소문이 무성해지자 베트남 외교부는 12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페트로 베트남에 따르면 엑손모빌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는 현재 계획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베트남 정부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소문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 홍콩의 아시아타임즈는 13일 “만일 엑손모빌이 블루웨일 프로젝트를 축소하거나 중단한다면 그것이 중국의 압박에 의한 것인 지, 아니면 블루웨일 가스전의 상업성에 대한 재고 때문인지에 관해 의문이 제기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싱가포르 스트레이츠 타임스 역시 15일 “베트남은 남중국해에서의 에너지 개발 프로젝트가 또 다시 중단되지는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싱가포르는 블루웨일 가스전 사업에 깊이 관여된 국가 중 하나다. 싱가포르투자청(GIC) 계열사인 셈콥이 육상에서의 발전소 건설 등을 위한 디벨로퍼 역할을 맡고 있다. 국내 건설사들도 셈콥이 발주한 EPC(설계·조달·시공) 입찰에 참여 중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혹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다. 17일까지도 엑손모빌, 페트로베트남 모두 이번 사안에 대해 일체의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하노이에 있는 한국 건설사 관계자는 “입찰에 참여 중인 건설사들이 이달 초 수정입찰서를 발주처에 제출했다”며 “아직까지 사업 지연이나 철회 등에 대해 발주처로부터 들은 바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베트남 정부가 외교부 공식 논평에서 엑손모빌 철수설을 명확하게 부인하지 않고 있는 점이 석연치 않다”고 말했다.
블루웨일 가스전이 주목받는 이유는 해양 자원을 둘러싼 베트남과 중국 간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 있어서다. 까버이산은 양국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돼 있는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 베트남명 쯔엉사 군도) 바로 근처다. 블루웨일 가스전은 베트남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있지만, 중국 역시 남중국해의 90%를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며 베트남의 가스전 독자 개발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계 거대 오일 메이저인 엑손모빌이 컨소시엄을 주도하고 있다. 자칫 블루웨일 가스전 개발이 미·중 갈등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베트남 정부는 2017년과 2018년에도 외국 기업과의 석유·가스 개발 사업을 시도했다가 중국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적이 있다. 스페인 에너지 기업인 렙솔이 까버이산에대한 시추권을 받았다가 중국의 압력을 못 이기고 사업권을 반납했다. 베트남 정부는 이후 아랍에미리트 기업에 면허를 줬다가 취소했다. 러시아 로스네프트와는 공동으로 조인트벤처를 설립해 뱅가드 뱅크에서 석유탐사를 진행중이지만, 중국의 압력으로 인해 제대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현재까지의 각종 추측들만으로 엑손모빌이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베트남 정부가 과거처럼 중국의 압박에 굴복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산업화를 서두르고 있는 베트남 입장에서 블루웨이 가스전의 가치가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응우옌 반 푹 베트남 총리가 발표한 전력공급에 관한 결정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푹 총리는 내년부터 베트남 내 전력공급이 어려워지고, 2022년부터는 전력 부족 사태가 예상된다며 지연되고 있는 발전 사업들을 조속히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블루웨일 가스전 사업에 대해서도 ‘지연 불가’를 주문했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베트남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다. 베트남이 현재 누리고 있는 외국인직접투자(FDI)의 혜택이 지속 가능하려면 싼값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갈등으로 중국을 탈출한 기업들이 베트남으로 몰려들면서 베트남 내 전력·도로·항만 등 각종 인프라의 부족 현상이 더 심해지고 있다. 블루웨일 가스전만해도 제대로 개발이 된다면 하노이만한 대도시에 20년 이상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 가스전 프로젝트는 베트남의 고질적인 문제인 국가 재정 부족을 해결할 단비와도 같다. 2017년 엑손모빌과의 계약 당시에 페트로베트남은 이번 개발 사업으로 약 200억달러의 수입을 베트남 정부에 안겨줄 것이라고 발표했다.

베트남 정부는 올 들어 중국의 자국 동해 침범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7월 남동부 배타적 경제수역에 있는 뱅가드 뱅크에 중국 석유탐사선 ‘하이양 디즈 8호’와 중국 해안 경비정이 진입했을 때 베트남 해안 경비정은 물러서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양측이 분쟁지역에서의 해상 충돌을 막기 위해 비선 라인을 활용해 협상에 나섰던 과거와 달리 7월의 베트남은 공개적으로 중국을 비난했다. 외교부가 중국 관련 기관에 공식 항의하고 국제적인 지원을 호소한 것이다. 중국의 압박으로 엑손모빌이 ‘푸른 고래’를 포기하는 일을 베트남 정부가 묵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베트남이 ‘푸른 고래’를 얻을 수 있을 지 여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카드’에 달려 있다는 게 중론이다. 베트남은 시진핑의 중국이 팽창주의 전략을 택하는 순간부터 미·중과의 균형 외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약 1000년간 베트남을 지배했으면서도, 사회주의 동맹으로 ‘큰 형’을 자처하는 모순적인 인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활용하겠다는 게 베트남 외교의 1순위 전략이다. 베트남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위안화 경제권으로의 종속이다. 이미 중국은 작년부터 한국을 제치고 베트남 최대 투자국으로 올라섰다. 베트남의 제1 수입국 역시 중국이다. 위안화 약세로 인한 값싼 중국산 제품의 유입은 토종 기업 육성을 바라는 베트남 정부의 비전에 늘 치명타를 날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베트남의 실용 외교에 응답할런지,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노이=박동휘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