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잿더미도 못본 제일평화 상인들 "정동영 왜" 고성

'제일평화시장 화재' 현장 르포

▽ 터전 잿더미된 상인들 생계 '막막' 눈물
▽ 정동영 현장 진입에 "국회의원 특권" 고성
▽ 다른 곳 장사하려 해도 권리금 못 돌려받아
▽ 옷 보관했던 인근 상인도 동시 '재산 피해'
23일 정오께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소방당국의 안내를 받으며 화재가 난 제일평화시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 배성수 인턴기자
가을 대목 옷 장사 희망마저 화마와 함께 잿더미가 됐다. 태풍 '타파'가 한반도를 휩쓸기 시작할 무렵인 22일 새벽 서울 동대문 제일평화시장엔 큰 불이 났다.

지하 1층, 지상 7층 건물내 의류 도소매 매장 200여 곳이 밀집한 탓에 불은 삽시간에 건물 구석구석으로 번졌다. 23일 오전 서울 중구 신당동 제일평화시장 건물 앞엔 전날 발생한 화재로 시름하는 상인들로 가득했다. 화재 30여시간이 지났지만 4, 5, 6층만 화재가 완전히 진압된 상태였다. 3층은 여전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같은 가을 옷 상품과 도매 원단이 건물 내부에 있지만 상인들은 내부 진입조차 못하고 있었다. 추가 피해 등을 우려해 소방당국이 출입을 막고 있어서다. 상가 입주민들은 "이제 가을 시즌이라 원피스 등 고가의 의류들이 많다. 단가가 높은 옷들이라 손해가 막심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정작 상인들은 피해상황을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정오쯤 건물 내부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상인들 사이에선 "우리도 못들어가는데, 국회의원은 무슨 특권으로 들어가냐"며 고성을 내뱉었다.

◆ "권리금만 2~3억"…손해 피할 길이 없다 당장 장사할 터전을 잃은 상인들은 "공장에서 옷을 가져오더라도 일일 매출에서 손해를 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22일 서울 중구 제일평화시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현재 화재 처리가 완료됐지만 건물 내 진입은 불가능한 상태다. (사진 = 김민지 인턴기자)
문제는 제평 상인들의 생계가 막막해졌다는 점이다. 상인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장사를 하려고 해도 화재로 권리금을 돌려받는 것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상가 임대인들은 전에 상가를 입대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관행상 권리금을 지불하게 된다. 상가를 임대한 이후 충분한 수익이 날 것을 예상하고 내는 금액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화재 등을 이유로 영업이 중단되면 권리금을 돌려받을 길이 막막해진다. 지인이 1층에서 상가를 운영해 걱정이 돼 와봤다는 변호사는 "제일평화시장 상인들은 권리금을 보통 2~3억원씩 지불한다"며 손해를 피할 길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제일평화시장 화재로 건물에 옷을 보관했던 인근 상인들도 피해를 봤다. 건물 4~7층은 인근 상인들이 의류창고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송 씨 역시 제일평화시장에 3000만원 어치 의류를 보관해왔다.

송 씨는 "불이 났다고 해서 어제부터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는 1억 5000만원 정도 손해를 봤다고 한다"며 "아직 어떤 대책이 나올 건지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근 상가들도 이번 화재로 피해를 보고 있다. 제일평화시장 옆 상가 지상 1층에서 의류를 판매하고 있는 이 모씨(57)는 "이 근방은 세가 비싸다. 하루라도 장사를 못하면 손해가 크다. 일요일도 장사를 하러 나왔는데 아예 접근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제일평화시장과 150m 떨어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내 카페 '카페 드 페소니아'도 전날 화재로 문을 닫아야 했다.제일평화시장에서 장사가 언제 재개될 지 여부도 아직 불투명하다. 제일평화시장 상가관계자는 상가 입주민들에게 "화재감식과 안전진단이 다 끝나야 정확한 피해 대책을 마련하고 장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정확한 날짜를 특정하진 못했다. 화재 발생 하루가 이날 오전 과학 수사대, 소방 화재조사 대원 및 서울시 관계자들은 현장 감식에 나섰다.

이날 소방 관계자는 "4, 5, 6층은 완전히 화재가 진압된 상태고, 현재 3층은 연기만 조금 나는 상태"라며 "경찰과 국과수가 화재 원인을 찾고 있다. 감식 결과가 나오고 최소 이틀 정도는 지나야 상인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제일평화시장은 층마다 상인연합회를 둬 각각 관리를 맡아왔다. 하지만 이번 화재와 같은 비상상황에선 연락망이 제대로 연결돼 있지 않다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입주민들에게도 화재 소식을 따로 전해준 사람은 없었다. 화재 소식을 뉴스를 보고 알았다는 강 모씨(52)는 "소식을 전해줄 체계나 리더가 없다"고 지적했다. 피해 대책 마련을 위해 상인들이 모이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이다.

◆ "우리도 못들어가는데, 국회의원 특권" 고성

이날 제일평화시장에선 상인들의 고성이 터지기도 했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화재 현장을 방문하면서 이를 두고 상인들이 격분해서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제일평화시장 진입을 위해 헬멧을 착용하고 있다. (사진 = 배성수 인턴기자)
정 대표는 23일 정오께 제일평화시장을 찾아 직접 화재 건물로 들어가 피해 상황을 살폈다. 이 과정에서 민평당과 제평 상가 관계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당초 화재 건물은 발생 원인 파악을 위해 피해 상인들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제일평화시장 총괄회장이라고 자신을 밝힌 한 상인은 "상인인 우리들도 못 들어가는데 국회의원이 무슨 특권으로 들어가냐"면서 "정치인들은 여론에 보여주기 식 행동을 그만두고, 실질적인 보상을 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조부곤 제일평화 상무 역시 "어제 경제과 중소벤처기업부 서울시에 피해상황을 모두 전달했다. 이런 식으로 정치인이 우르르 방문하는 것이 불편하다"며 "(민평당의 방문과 관련해) 상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전날 박원순 서울시장은 화재 현장을 방문한 뒤 특별재정 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진영 안전행정부 장관도 화재현장을 찾았다.

이에 민평당은 피해 구제를 위한 차원이라고 해명했다. 정동영 대표는 "전국적으로 소상공인 하시는 분들이 어려운데, 불의의 화재사고로 소상공인 자영업 하시는 분들이 화재피해를 받게 돼 안타깝다”며 "200여개 점포가 넘는 대규모 피해가 났기 때문에 위로와 함께 피해 구제를 위해 저희가 그 분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대변하는데 힘쓰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영욱 민평당 사무총장은 "우리는 피해상황을 보고 받아야 하는 입장인데 상인들이 화를 내기만 한다"며 "정당 차원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상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해명했다.

다른 민평당 관계자도 역시 "생색내려고 현장에 온 것이 아니다"며 "정치인과 다르게 행정기관은 매뉴얼대로만 하기 때문에 상인들이 우리에게 피해 사실을 알려줘야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평화당은 "정동영 대표는 신속한 안전진단 조치를 요구하는 시장 상인들의 목소리를 현장 방문 직후, 정문호 소방청장과 서양호 중구청장에게 직접 전화해 전달했다"며 "소방청장과 중구청장은 흔쾌히 신속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밝혔다. 전날 0시39분께 제일평화시장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는 3층에서 시작돼 화재 발생 16시간 만에 꺼졌다. 불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3층에는 스프링클러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문을 연 제일평화시장은 당초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지어졌으나 2014년께 4개 층을 증축했다. 스프링클러는 새로 지어진 4∼7층에만 설치돼 있다.

고은빛 한경닷컴 기자 silverlight@hankyung.com
배성수 김민지 인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