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백종윤, '40년 기계외길' 걷다 협회장 맡아…업계 숙원 기계설비법 통과 이뤄내

백종윤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 회장

건물 배관·설비 체계적 관리 가능
미세먼지·메르스 확산 방지 길 열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흔히 건물을 콘크리트 덩어리로 인식하지만, 거대한 기계장치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냉난방 설비, 수도 배관, 급탕·배수 설비, 가스·공기조화 설비 등의 기계설비가 없으면 건물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외벽과 골조를 빼고 나면 사실상 건물을 채우는 건 기계설비다. 인체에 비유하자면 각종 장기(臟器)의 역할을 한다.

기계설비를 일반 건축물 및 공장, 발전소 등에 제작해 시공하고 설치하는 업체들이 모인 단체가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다. 기계설비는 일반인에겐 생소한 편이지만 종사자 50만 명, 연간 매출 36조원에 이르는 주요 산업 분야 가운데 하나다.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의 백종윤 회장(64·윤창기공 대표)을 서울 방이동의 순댓국집 ‘청와옥’에서 만났다. 순댓국을 파는 여느 음식점에 비해 깔끔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집이다.주문을 마치자마자 순댓국과 함께 특이하게 나무상자에 담긴 순대 수육이 나왔다. “깨끗하고 청결하고 음식이 빨리 나와 자주 찾는 곳입니다.” 기계를 다루는 엔지니어다운 취향이 엿보이는 듯했다. 두툼한 순대의 식감은 쫄깃하면서도 실했다. 백 회장은 뽀얗고 구수한 국물을 권하며 기계설비업계에 뛰어들게 된 옛이야기를 꺼냈다.

40여 년간 기계설비 ‘한우물’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백 회장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전북 군산에서 보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당시 5년제 국립학교로 운영되던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현 서울과학기술대) 기계과에 진학했다. 50년 가까운 기계 인생의 출발이었다.

“군산 촌놈이 경기공전이 뭔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선생님이 서울의 고등학교로 유학 보낼 8명을 뽑고 각자 시험 볼 학교까지 정해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경쟁이 꽤 치열할 때였는데 운 좋게 합격했습니다.”

경기공전을 졸업한 그는 1977년 건설회사 삼환기업에 입사했다. 보일러 설치 등을 담당하는 기계설비 부서였다. 본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삼환기업이 경북 포항제철에 짓는 발전소 7, 8호기 건설 현장으로 파견됐다. 발전은 물론 용광로에서 쇳물을 녹일 때 나오는 고온의 폐열을 발전소로 보내는 설비를 건설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서울 남산자락에 있던 중앙정보부 감찰실 건물 설비공사를 맡았을 땐 “공사가 늦다”며 혼쭐이 나기도 했다. 정신없이 여러 공사 현장에서 몇 년을 보낼 무렵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어느 날 직속 상무님이 찾기에 갔더니 기계설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업체를 설립하겠다면서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그때 중동 건설 현장에 가고 싶어 다른 건설회사로 옮기기로 확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마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선배도 상무님을 따라가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통에…. 돌이켜보면 평생 기계설비 분야를 파는 팔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하.”

담당하는 업무에 큰 차이는 없었지만 명목상 건설인이 아니라 ‘기계인’으로 새 출발했다. 이 회사에서 13년간 근무하던 그는 1996년 자신의 회사인 윤창기공을 차려 독립했다. 원자력발전소, 가스·비료 플랜트, 자동차 공장 배관, 상업용 건물 및 아파트 배관공사 등이 주요 업무다. 백 회장은 그동안 쌓은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윤창기공을 지난해 기준 업계 순위 16위(매출 1630억원)로 키워냈다.

부추를 가득 넣은 담백한 순댓국이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살집이 부드러운 수육을 먹으며 대화는 이어졌다. 백 회장이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 회장을 맡은 건 2017년 3월부터다.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됐다. “기계설비건설협회는 다른 협회와 달리 선거가 없습니다. 창립 초기부터 총회에서 단일후보를 만장일치로 선출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원사 간 이전투구도 없고, 금권선거니 하는 볼썽사나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숙원이던 ‘기계설비법’ 제정

10대 회장에 오른 백 회장의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역시 ‘기계설비법’ 제정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기계설비법은 2017년 10월 발의돼 지난해 4월 제정됐다. 새 법안치곤 이례적으로 7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백 회장은 “협회의 단합된 힘이 있기에 가능했다”며 공을 회원사들에 돌렸다. 기계설비법은 기계설비업계의 해묵은 숙원이었다. 기계설비와 관련된 조항이 그동안 건설산업기본법, 건축법 등 여러 법령에 흩어져 있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계설비 분야는 건설공사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산업입니다. 선진국과 달리 그동안 건설법 등에 예속돼 있어 정부 지원이 부족하고 업계 발전에도 제약이 따르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기계설비법은 한마디로 기계설비 산업만을 위한 독자법이다. 백 회장은 취임 직후 기계설비법 제정을 위해 국회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법 개정을 ‘밥그릇 싸움’으로 여겨 곱지 않게 보던 유관단체들을 설득하는 일도 백 회장 몫이었다. 그는 기계설비건설협회의 입장을 외면하던 협회장들을 찾아다니며 소통에 나섰다. 협회 내에서도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매주 한 차례 기계설비법 제정이 왜 필요한지를 논리적으로 다듬고 무장하기 위한 세미나를 열었다.

예상보다 빨리 기계설비법이 제정되는 성과를 낸 데는 때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잇따른 사건이 터지면서 일반인에겐 생소한 기계설비 분야의 중요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덕이다. 2015년 터진 ‘메르스’ 감염 확산이 멍석을 깔아줬다. 당시 병원마다 확산 방지 환기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기조화 설비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미세먼지의 위험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기계설비법 제정에 날개를 달아줬다. 실내 공기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선 기계설비의 기술 발전이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퍼져갔다. 백 회장은 “기계설비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국회의원들이 비로소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법 제정의 취지를 설명하는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고 설명했다.

“일자리 창출, R&D 통한 혁신 기대”

내년 4월부터 시행되는 기계설비법은 기계설비 분야의 체계적인 설치와 유지 관리 기준을 담고 있다. 정부도 법적 근거에 따라 기계설비 발전 계획을 5년 단위로 수립해야 한다. 연구개발(R&D) 비용도 지원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기계설비산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기계설비업계는 유지 관리에 따른 일자리도 5만 개 이상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백 회장은 기계설비법이 단순히 업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과 안전,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건물에 들어가는 각종 기계설비의 사후관리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메르스 사태가 확산된 것도 유지 관리에 관한 법적 근거가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현행 법규로는 공조 환기시스템에 먼지가 쌓여도 건물주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방치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앞으로는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이 정착될 겁니다.”

백 회장은 건물의 에너지 효율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기계설비법으로 최적 설비가 가능해져 일부 업체의 과다 설치 등 부작용을 방지할 수 있어서다. 기계설비 설치 후 사용 전 검사, 일정 기간 이후의 유지 관리 방식도 의무화된다. 이런 점에서 기계설비법은 사실상 기계설비 업체들에 적잖은 규제로 다가올 전망이다. 백 회장은 그러나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 믿고 있다. 해외시장을 공략하려면 채찍을 통한 기술 발전이 시급해서다. “기계설비법은 단순히 업체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업체들은 불편해질 겁니다. 지나온 30년이 아니라 앞으로 30년을 내다보면 반드시 필요합니다.”

■ 한기계설비건설협회는…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는 1989년 대한전문건설협회에서 분리 독립했다. 기계설비공사의 중요성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서다. 건설업체 시공능력평가, 시장 모니터링, 관련 분야 자격증 발급 등 기계설비분야 관련 정부위탁사업을 맡고 있다. 회원사 의견을 수렴해 기계설비업 관련 제도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에는 기계설비산업법 제정을 이끌면서 관련 산업 발전의 제도적 토양을 마련했다.

기계설비공사업체 7000여 개 등 8000여 개 업체가 이 협회의 회원사다. 서울 중앙 본회 외에 전국 13개 시·도에 사무처를 두고 있다. 협회업무와 지역별 사업을 분담 운영한다. 2015년 대한설비건설협회에서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 백종윤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 회장 약력

△1956년 광주 출생
△1977년 경기공업고등전문 학교 기계과 졸업(5년제)
△1977~1980년 삼환기업 근무
△1996년 윤창기공 설립
△2014~2017년 대한기계설비 건설협회 서울특별시회 회장
△2017년~ 대한기계설비단체 총연합회 회장
△2017년~ 기계설비건설공제 조합 운영위원장
△2017년~ 대한기계설비 건설협회 회장
△2017년~ 대한기계설비산업 연구원 이사장
△2018년~ 대한건설단체 총연합회 부회장
△2019년~ 시설공사업단체 연합회 회장
■ 백종윤 회장의 단골집 청와옥

가마솥으로 푹 삶은 순대…오징어 숯불구이도 별미

순대 요리 전문점 ‘청와옥’은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인근에 있다. 지하철 9호선 한성백제역
3번 출구에서 가깝다. 지난 5월 개업했다. 순대 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점심·저녁마다 주변 업무지구에서 온 직장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청와옥의 순대는 ‘서민 음식의 고급화’로 요약된다. 순대소는 최상품 채소와 돼지고기를 사용한다. HACCP(식품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 인증을 획득한 직영 순대 공장에서 이 업체만의 노하우를 활용해 재료를 배합한다. 이렇게 생산된 순대는 식당에 마련된 무쇠 가마솥에 삶아 식탁에 올린다. 대형 가마솥에서 오랫동안 푹 삶기 때문에 순대와 수육의 육질이 부드러운 게 특징이다. 가마솥은 원적외선 특허기술을 적용한 제품을 사용한다.이 식당의 인기 메뉴는 ‘순대 정식’이다. 순대국밥과 함께 정갈한 모양의 나무상자에 담긴 수육과 순대를 제공한다. 공깃밥은 가마솥밥으로 변경할 수 있다. 가마솥밥 누룽지를 후식으로 먹기 좋다. 곁들임 메뉴로 제공되는 한우육사시미와 청와옥만의 ‘빨간 소스’를 가미한 오징어 숯불구이도 이 식당의 별미다. 오승준 청와옥 대표는 “순대는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사랑받아왔다”며 “순댓국의 품격을 올리기 위해 청와옥을 개업했다”고 설명했다.

이정선 기자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