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때 ‘노비는 주인의 재산’이라는 첫 노예법 생겼죠…고려 노비는 해방 가능성 있는 ‘기한부 채무노예’ 성격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27) 고려의 노비제(상)
1354년 직장(直長) 윤광전이 아들에게 한 명의 비를 지급한 문서.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상속문서다.
한국사에서 노비(奴婢)는 삼국시대에 왕실과 귀족의 가내 노예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삼국의 통일전쟁 과정에서 포로 출신인 노비가 증가했다. 7세기부터는 범죄자의 가속을 노비로 적몰(籍沒)하는 형벌이 생겨났다. 그 연장선에서 고려왕조는 노비법을 제정하고 강화했다.

삼국시대의 가내 노예 986년 노비의 가격이 정해졌다. 노는 포 100필, 비는 포 120필이었다. 이 법은 노비가 주인의 재산임을 명시한 최초의 노예법이었다. 1039년에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 제정됐다. 주인이 다른 노와 비가 출생한 아이는 비의 주인에 속한다는 취지다. 이 법은 노비의 결혼과 신분 세습을 당연시하는 가운데 소속이 다른 노와 비가 결혼하는 일이 잦아진 시대상을 전제했다. 1136년에는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다가 스스로 목을 맨 경우 주인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주인이 노비를 처벌하는 중에 노비가 두렵거나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하더라도 주인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법을 계기로 고려의 노비는 생사여탈이 주인에게 장악된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했다.

노비 해방 반대했던 충렬왕

1287년 충렬왕은 노비를 양인으로 해방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반포했다. 당시 고려는 원(元)제국에 복속했다. 원의 황제는 고려왕에게 노비제를 폐지하라고 명했다. 그에 대해 충렬왕은 “우리의 태조가 ‘노비는 그 종자가 있으니 이를 해방하면 끝내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유훈을 내렸으며, 그 이후 노비제는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내려왔다”고 항변했다. 태조 왕건이 그런 유훈을 내린 적은 없다. 충렬왕의 변명은 거짓말이라기보다 10세기 이래 그 처지가 악화돼 온 노비에 대한 고려인의 집단 인식을 충실하게 대변했을 뿐이다. 막상 노비 해방을 금한 사람은 충렬왕 자신이었다. 충렬왕이 빙자한 태조의 유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려인은 노비를 반역과 범죄에 대한 처벌로 생겨난 국가노예로 불온시했다. 그런 이유에서 고려왕조는 양인과 노비의 결혼을 강하게 억제했다. 노가 양인 여자와 결혼한 경우 노의 주인이 시켰으면 주인을 장(杖) 100대에 처했으며, 양녀의 부모는 1년의 유배형에 처했다. 또 일반 사가의 노비라 해도 왕실이 그 사용을 허락해 지급한 종자(從者)와 같은 존재로 간주했다. 그로 인해 고려왕조는 국인들이 함부로 노비를 매매하는 것을 금했으며, 이를 범한 자를 귀향형(歸鄕刑)에 처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이 법은 고려 말기까지 유효했다. 1308년 충선왕은 민간이 함부로 매매하거나 남에게 기증한 노비를 모두 조사해 왕실의 소유로 돌렸다.

노비가격은 포 100~200필 값

이 같은 역사적 토대에 구애돼 노비법 강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노비는 끝내 주인의 완전한 사재(私財)가 아니었다. 그 점에서 후대 조선의 노비와 크게 달랐다. 포 100~120필의 노비 가격은 하루 임금이 1필이므로 100~120일의 노동가치에 해당했다. 노비가 열심히 일하면 수년 안에 몸값의 원리(元利)를 상환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이었다. 고려왕조는 채무에 몰린 사람이 자녀를 노비로 파는 행위를 승인하지 않았다. 채무와 그에 따른 인질은 3~6년의 기한부 소각질(消却質)로 취급됐다. 이에 주인과 노비의 관계에 관한 한, 고려의 노비는 해방의 가능성을 전제한 기한부 채무노예와 같은 존재였다. 세계사의 여러 시대와 지역에 등장한 노예는 자기 공동체를 상실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공동체 밖에서 끌려왔거나 범죄 등의 이유로 공동체 밖으로 내쳐진 자들이다. 노예의 본질은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이다. 노예의 이름, 복식, 두식에는 그의 사회적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이 부착됐다. 고려의 노비에게 강요된 상징은 어떤 것이었나. 여러 고문서나 석문에서 전하는 노의 이름은 천하지 않았다. 1198년 개경에서 노비의 난을 일으킨 주동자는 만적(萬積)이었다. 약목현 정두사 석탑의 건립에 시주한 어느 노의 이름은 덕적(德積)이었다. 모두 불심이 가득한 이름이었다.

■기억해주세요

1136년에는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다가 스스로 목을 맨 경우 주인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주인이 노비를 처벌하는 중에 노비가 두렵거나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하더라도 주인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법을 계기로 고려의 노비는 생사여탈이 주인에게 장악된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