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후배 눈치까지 보는 '낀 세대' 직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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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시키느니 나홀로 야근“힘든 일이 있냐고 후배에게 먼저 물어봐도 안 돼요. 혹 힘들다고 하면 ‘그렇구나, 힘들었구나’라고 맞장구도 쳐줘야 합니다. 그래야 ‘꼰대’ 소릴 안 들어요.”
쓴소리 하면 '익명 고발' 걱정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김과장들 "꼰대 노이로제 걸릴 판"
서울 구로구 가산디지털단지 내 중소기업에 다니는 박 과장의 넋두리다. 박 과장뿐만이 아니다. 상당수 김과장 이대리가 ‘꼰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란 호소를 한다. 무심코 “나 때는 말이야…”라고 운을 뗐다간 꼰대라는 소릴 듣기 일쑤다. 이런 말을 빗댄 ‘라테 이스 호~스(Latte is horse)’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다.외로운 ‘낀 세대’
김과장 이대리들은 자신들을 ‘낀 세대’라고 부른다. 직장 선배들 세대는 한국 특유의 군대 문화를 바탕으로 지금껏 지켜온 권위를 당연하다는 듯 누린다. 1990년대 태어난 사회초년생들은 선배에게도 호락호락 넘어가질 않는다. 입사 10년차 안팎의 김과장들은 어정쩡한 위치가 됐다. 선배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후배에게 뒤에서 욕먹는 처지라는 하소연이다. 요즘엔 선배들 못지않게 후배들 눈치를 더 봐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유통회사에 다니는 고 차장은 올 들어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혼자 먹을 때가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후배들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는 말을 꺼내기 부담스러워졌다고 한다. 강압적으로 비칠까 걱정한 탓이다. 고 차장은 “개인생활을 중시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저녁 자리를 만들자는 얘기를 못 꺼낸 지 오래됐다”며 “요즘엔 점심 식사 자리도 피해주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식사 때마다 팀과 부서 단위로 우르르 몰려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혼자 남아 야근을 도맡은 ‘낀 세대’도 늘고 있다. 한 출판사에 다니는 윤 팀장은 팀원들을 모두 퇴근시키고 혼자 남는 날이 적지 않다. 팀원들이 최종 확인을 해야 하는 원고를 저녁 늦게 넘기고 곧바로 퇴근해버리기 때문이다. 윤 팀장은 “나도 일찍 퇴근해야 하니 원고를 빨리 넘겨달라”고 닦달도 해봤다. 하지만 “업무는 많은데 사람이 적다. 사람을 더 뽑아달라”는 답만 돌아왔다.
윤 팀장은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때 회사에 사람 더 뽑아달라는 얘길 어떻게 전하겠느냐”며 “가운데 낀 내가 어쩔 수 없이 야근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털어놨다. “팀원들이 퇴근할 때 괜히 눈치라도 주면 직장 내 괴롭힘 사례로 찍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익명 고발 무서워 할 말도 못해꼰대라고 뒤에서 욕먹는 건 그나마 견딜 만하다고 한다. ‘익명 고발’ 대상에 오르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라고 다들 입을 모은다. 앱(응용프로그램)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고발은 완벽한 익명성이 보장되고 조직 구성원 전체가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파괴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 걸렸다간 공개 망신을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회사 인사위원회에 끌려가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후배들에게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김과장도 많아지고 있다. “선배보다 후배들이 더 무섭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익명 게시판에 내 이름이 오를까 노심초사하면서 후배들 눈치만 보기 일쑤다. 한 금융공기업에 다니는 전 과장은 출퇴근길마다 익명 커뮤니티 앱을 들여다본다. 처음엔 상사 뒷담화와 회사 문제를 지적하는 게시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에 대한 뒷담화가 올라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앱을 들여다보게 됐다고 한다. 전 과장은 “후배들에게 한소리라도 한 날에는 앱을 켜보기 겁이 날 정도”라고 털어놨다.
무분별한 익명 고발로 억울한 피해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 전자회사에 다니는 김모씨는 “최근 익명 앱에 ‘상사가 심하게 괴롭힌다’는 고발성 글이 올라왔는데 친한 선배가 가해자로 지목됐다”며 “시시비비를 가려보니 별일도 아니었는데, 그 선배는 조직 내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고 전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후배에게 정당한 업무 지시도 꺼려질 때가 꽤 있다”고 했다.후배들까지 ‘상전’으로 모시게 됐다는 자조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상사에게는 깍듯이 의전을 챙기면서 후배들과는 수평적인 소통을 해야 하는 ‘낀 세대’의 서글픔에 대한 토로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최 과장은 “낀 세대가 겪는 진짜 어려움은 우리의 얘길 들어줄 세대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사에게 뭐라도 말하면 칭얼거린다는 소릴 듣고, 후배에게 말해봤자 꼰대 소리밖에 더 듣겠느냐”며 웃었다.
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