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시대' 향한 美 최고 서평가의 독설

미치코 가쿠타니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칼럼니스트인 주인공이 자신의 책에 관한 서평이 실린 신문을 떨면서 사 오는 장면이 있다. 이 서평가는 영미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서평가로 꼽히는 미치코 가쿠타니다.

워싱턴포스트, 타임을 거쳐 1979년 뉴욕타임스에 합류한 그는 1983년부터 2017년까지 서평을 썼다.

칭찬 일색의 '주례사 비평'이 대부분인 다른 서평가들과 확연히 구분됐다. 무라카미 하루키, 수전 손태그, 노먼 메일러 등 문단의 거목들을 향해서도 신랄한 독설과 혹평을 서슴지 않아 '1인 가미카제'로도 불렸다.

그는 작가들과 어울리지 않고 문학판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다.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냉정한 평가에 집중했다. 무자비하게 비판을 가하는 가쿠타니는 작가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출판계와 독자들에게는 신뢰를 얻었다.

여러 드라마에도 언급될 만큼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된 그는 1998년 비평 분야 퓰리처상을 받았다. 2017년 그가 퇴사할 때 뉴욕타임스는 '미치코 가쿠타니, 타임스의 무섭고 존경받는 서평가, 사임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퇴직 소식을 전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미치코 가쿠타니가 뉴욕타임스 퇴임 후 출간한 첫 책이다.

40년 넘게 수많은 인터뷰와 논평 기사를 썼지만 그가 책을 펴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며, 국내에는 처음 소개된다.

이 책에 앞서 그는 30년 전 여러 작가와 예술가 인터뷰를 묶은 '피아노 앞 시인'을 출간했다.

뉴욕타임스에서 퇴직한 후 본격적으로 저술가의 삶을 시작한 미치코 가쿠타니가 이번에 낸 책은 정치·문화서다.

유명 작가들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쏟아냈던 저자의 펜 끝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도 날카롭기 그지없다.

책은 가짜 뉴스가 판치는 트럼프 시대를 '진실의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다룬다.

번역본은 역설적인 제목을 달았지만, 원제는 '진실의 죽음: 트럼프 시대의 거짓말에 대한 고찰'이다.

저자는 트럼프의 거짓말뿐만 아니라 진실과 이성이 위험에 처한 이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파헤친다.

트럼프가 거의 하루 평균 5.9가지 거짓말을 한 셈이라고 비판한 저자는 사람들이 선동과 정치 조작에 쉽게 영향받고 국가가 '예비 독재자'의 손쉬운 희생물이 되게 하는 상황을 우려한다.

그는 "트럼프의 거짓말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와 규범에 가하는 공격을 경고하는 많은 적신호 가운데 가장 선명히 깜빡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진실에 대한 공격은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라며 "세계 곳곳에서 포퓰리즘과 근본주의의 물결이 일면서 이성적 논의보다는 두려움과 분노에의 호소가 우위를 차지해 민주주의 제도가 약화되고 전문지식이 대중지성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낸 사회학자 대니얼 패트릭 모이내핸의 말을 통해 분열이 극단화한 사회에서 자신들의 선입관만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충고한다.

가짜 뉴스와 혐오가 널린 퍼진 우리 사회에도 시의적절하게 들린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지, 저마다의 사실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
돌베개. 김영선 옮김. 정희진 해제. 208쪽. 1만3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