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맞춤형 냉장고' 주문 후 배송 단 4일…삼성전자판 '로켓 배송'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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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포크 냉장고' 돌풍지난 3월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경영진은 맞춤형 냉장고 ‘비스포크’ 출시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비스포크는 원래 ‘맞춤 양복’을 뜻한다. 비스포크 냉장고는 9가지 색상에 7가지 모듈로 구성돼 2만 가지 이상의 조합이 가능하다. 문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색상과 디자인으로 맞춤형 제품을 선보인다는 장점이 재고 관리 측면에서는 엄청난 부담이라는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가전업계 최초로 주문 후 생산(BTO : build to order)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했다. 그동안 가전업계에선 판매 물량이 많지 않은 일부 제품에만 적용해온 방식이다. 주력으로 판매하는 제품에 BTO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삼성전자가 처음이다.다품종 소량생산 체제기업들이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제조방식부터 공급망관리(SCM)까지 생산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있다. 소비시장의 주류로 등장한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가 색상이나 디자인에서 ‘나만을 위한 제품’을 원하면서 생긴 변화다. 삼성전자의 비스포크, 현대자동차의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베뉴’, LG전자 가구형 가전 ‘오브제’ 등 소비자 맞춤형 제품이 잇따라 출시되면서 생산방식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다.
'나만의 제품' 원하는 트렌드 맞춰
9가지 패널 색상·7가지 모듈
2만 가지 이상 조합 가능
삼성닷컴서 색상 시뮬레이션
삼성전자는 지난 3월 비스포크 출시를 결정한 뒤 ‘비스포크 프로세스 구축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다. 총 2만 가지의 조합이 가능한 상황에서 이전처럼 수요를 예측해 미리 제품을 만들어놓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수요 예측에 실패할 경우 엄청난 양의 재고를 떠안아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삼성전자는 생산 체제를 이원화하기로 했다. 수요 예측을 통해 흰색, 회색 등 인기가 꾸준한 무채색 제품은 미리 만들어 주문을 받으면 바로 배송한다. 기존의 SCM과 같은 방식이다. 반면 핑크, 민트 등 소비자들의 개성이 반영된 색상이 조합된 모델은 BTO 방식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생산계획을 편성해 제품을 만든 뒤 배송하는 방식이다.주문부터 배송까지 목표로 한 기간은 단 4일. 이보나 생활가전사업부 냉장고제품전략담당은 “처음에는 삼성의 표준화된 SCM 시스템에 BTO 방식을 접목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며 “제조, 영업, 물류 등 전 부문이 유기적으로 협업하고, 부문별로 납기를 최대한 단축한 덕분에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수요 예측에 강한 삼성전자도 소비자들의 마음을 미리 예측하는 것은 어려웠다. 80~90%가 무채색 냉장고를 선택할 것이란 예상은 3개월 만에 빗나갔다. 다양한 색상으로 주방에 포인트를 주려는 개성이 강한 소비자가 의외로 많았다. 현재 비스포크의 BTO 비율은 35%에 달한다. 35% 소비자가 유색 포인트를 추가한 제품을 구매하고 있다는 의미다.
최철우 생활가전사업부 제조지원담당은 “BTO 도입 이후에도 기존 제품과 비슷한 수준의 생산효율이 유지되고 있다”며 “제조 방식 역시 소비 트렌드 변화에 맞춰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모듈 자유자재 조립
비스포크 제품 중에서도 키친핏 모델은 5개의 모듈을 자유자재로 조립해 사용하는 ‘모듈형 냉장고’다. 모듈형 냉장고를 선보이는 과정에도 혁신이 필요했다. 기존의 냉장고는 설치할 때 벽이나 주변 가구와 5㎝ 이상 떨어뜨려 놓아야 했다. 냉기를 유지하기 위해 냉장고 안의 뜨거운 바람을 바깥으로 빼낼 공간이다. 하지만 냉장고 옆에 또 다른 냉장고를 붙여야 하는 비스포크는 이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발팀은 방열 구조를 개선하고 냉장고 문을 새로 설계해 최소한의 공간(7~15㎜)만 있으면 모듈을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제품군이 다양해지면서 마케팅 방식에서도 변화를 꾀했다. 다양한 색상·모듈 조합을 소비자가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 공식 홈페이지인 삼성닷컴에서는 원하는 색상과 조합을 직접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다. 삼성디지털프라자 강남본점에는 ‘#프로젝트프리즘’ 쇼룸을 조성해 방문객이 제품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타깃도 단순히 밀레니얼 세대가 아니라 ‘밀레니얼의 마음가짐’을 가진 소비자로 넓혔다. 판매의 연속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솔레니얼(1인 가구) △허니문 △트렌디맘 △영포티(젊은 40대) △파워맞벌이 등으로 고객군을 세분화했다. 1인 가구는 주로 기본적인 소형 냉장고를 고려한다. 이들이 자취를 시작할 때 비스포크를 구매하면 이후 가족이 생기고 취향이 바뀌어도 모듈을 추가로 붙여 가면서 제품군을 확장할 수 있도록 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4분기 비스포크가 삼성전자 냉장고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5%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전자는 직화 오븐 등으로 비스포크 제품군을 넓혀간다는 계획이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