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단기는 'R', 장기는 'D' 를 경계해야

지금은 '플러스 저물가' 지속
디스인플레이션 상황

디스인플레가 잦으면
디플레에 빠질 수 있는 만큼
단기 경제침체 대처하면서
최악 디플레 경각심 높여야

안동현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동기 대비 -0.4%로 마이너스를 찍었다. 1965년 통계 작성 이래 처음이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회자되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물가 하락이 상품이나 용역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런 측면에서 물가 하락이 아직 한 달에 불과하고 하락 품목이 30% 이하에 그쳤다는 점에서 디플레이션을 논하기엔 이른 감이 있다.지난달의 물가 하락을 주도한 주요 품목은 농산물과 석유류다. 이들 품목은 수요가 안정적인 반면 공급 측 요인에 의한 가격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정책에서는 이들을 제외한 근원물가지수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실제 지난달 근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0.6% 상승해 한국은행이 목표로 삼고 있는 2%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마이너스를 찍지는 않았다. 즉 아직 수요 부족이 물가 하락을 촉발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상황은 디플레이션이라기보다 플러스의 저물가 상황이 지속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으로 진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디스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은 물가 상승률의 부호와 지속성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저물가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자칫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정책의 유효성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디스인플레이션은 물가 상승률이 낮긴 하지만 플러스값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이 단기적이란 특성이 있다. 디스인플레이션은 경기둔화 또는 침체를 동반하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자국 통화 절상과 같은 기타 목적으로 중앙은행이 일시적으로 통화 공급량을 줄일 때도 발생한다. 또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이 반드시 하락하는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상승할 수 있다. 이렇게 디스인플레이션은 순환적 요소를 띠기 때문에 금리를 낮춰 통화 공급량을 늘리는 기존의 통화정책이 유효하며 재정정책의 효과 역시 높은 편이다.반면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디플레이션은 기술혁신과 같은 이유로도 발생할 수 있으나 유효 수요 부족이나 자산 버블의 붕괴로 발생할 땐 치명적이다. 바로 ‘디플레이션 악순환(deflationary spiral)’ 때문이다.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찍으면 미래의 현금가치가 높아지고 위험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현금선호 현상이 촉발되고 소비와 투자가 위축된다. 이에 따라 성장률이 떨어지고 고용 감소, 총수요 감소로 이어져 물가 하락이 가속화되며 자산가격은 폭락하게 된다. 채무자로서는 상환 부담이 높아지기 때문에 가계나 기업의 채무불이행이 급증하고 줄도산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한 번 빠지면 치명적이며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전형적인 디플레이션의 예다. 1990년 이후 연도별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해가 무려 13번이나 된다. 일본의 경험에 비춰보면 디플레이션은 백약이 무효다. 전통적인 통화정책은 전혀 효과가 없었고 재정정책 역시 천문학적인 국가부채만 남겼을 뿐이다. 초기에 더욱 강력한 재정정책을 펼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실효성에는 여전히 의문이 있다. 마이너스 금리나 양적완화 등 최근의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대안으로 떠올릴 수 있지만 그 효과에는 아직 의문부호가 달려 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9월 제조업과 서비스 구매관리자지수(PMI) 둘 다 큰 폭으로 하락했다. 더불어 비농업 일자리 증가가 약화되면서 독야청청이던 미국의 경제마저 둔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디스인플레이션을 동반한 경기침체(R·recession)에 대한 대처가 먼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경기침체와 디스인플레이션이 L자형으로 장기화될 경우 디플레이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경제가 주요 산업의 경쟁력 약화와 생산가능인구의 감소 등으로 외부 충격에 취약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잽을 많이 맞다 보면 그로기가 되는 것처럼 디스인플레이션이 잦으면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R’의 우려를 불식시켜야겠지만 장기적 위협 요인인 ‘D(deflation)’에 대한 경계심도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