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사망사고 진상규명, 최선 다하지만 시간 걸려…유족에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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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진상규명위 조사2과장 "구타 피해 장병들 생각에 잠 못이뤄"
'군납비리 내부고발' 전직 해군 소령…영화 '1급기밀' 모델 "깊이 고민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너는 그때 어떤 심정이었냐. 왜 죽었냐'면서 망자(亡者)들에게 말을 걸게 되더라고요. "
김영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2과장은 8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수십년 전 열악한 환경에서 선임에게 맞으며 군 생활을 한 장병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9월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출범한 위원회는 1년간 703건의 진상규명 신청을 받았고, 현재까지 13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619건은 조사가 진행 중이고, 71건은 각하·취하 등으로 종결됐다. 진상규명된 13건 중 9건을 조사2과에서 담당했다.
조사2과를 이끈 김 과장은 군납비리 내부고발자로 알려진 전 해군 소령이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 '1급 기밀'로 제작돼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멀게는 수십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진상규명 작업 결과물은 당시 군 당국이 은폐·축소하려 한 사건 경위를 뒤집기도 했다.
1969년 정모 일병이 수류탄 폭발로 숨진 사고에 대해 당시 군 당국은 '폭우로 유선 상태를 확인하려고 잠복호에 들렀다가 수류탄을 호기심에 만지다가 폭발해 오른발과 오른손 절단 및 심장 파편창으로 현장에서 사망하고, 경계병 2명에게 상해를 입힌 사고'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진상규명 결과 정 일병은 공무수행 중 벌어진 사고의 피해자였다. 김 과장은 "군 조사 기록에 '호기심에 수류탄을 만졌다'는 말이 나오는데 '호기심'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었다"며 "선임 두 명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곳에 후임병이 일부러 찾아가 호기심에 수류탄을 만지다 터뜨렸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보통 매장·화장 보고서에 사망 원인이 '군 복무 염증'으로 나와 있으면 축소·은폐된 사건인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세월이 오래 지난 사건의 경우 유족이 진상규명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기도 한다.
1980년 총기로 목숨을 끊은 김모 이병은 부대 내 가혹행위 등이 사망 이유로 밝혀졌지만, 모친은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인 지난 1월 작고했다.
김 과장은 "지난 39년간 김 이병 부모님은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군과 싸워 왔는데, 어머니는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를 못 보시고 지난 1월 세상을 뜨셨다"며 "이처럼 부모님이 안 계시면 유족 연금을 지급할 수가 없어 신속하게 해결해야 할 사건들이 많다"고 했다. 김 과장은 지난 1년간 실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전쟁 영웅을 국립묘지로 모실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숨진 박모 소위는 68년 만에 전사자로 인정됐다.
그는 강릉농고에서 배석장교(교련 교사)로 근무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보충장교령에 의해 소위로 소집됐다.
그해 9월 영천 전투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다친 뒤 군 병원에서 치료받다 소집해제됐고, 이듬해 4월 28세로 사망했다.
김 과장은 "군 당국은 박 소위가 사망 전 소집해제됐다는 이유로 전사자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당시 소집해제 명령서를 본인이나 가족에게 전달하거나 통보하지 않았다"며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장교를 전투 중 다쳤다는 이유로 소집해제하고 전사자로 인정하지 않는 건 국가가 참전용사를 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진상규명위 결론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국방부에 있다.
국방부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위원회 결정을 따라아 한다'는 규정에 따라 결론을 낼 것으로 보인다.
김 과장은 "군복무 중 사망한 7만9천여명 중 미순직자가 3만9천여명인데, 이 가운데 진정서가 접수된 건을 조사하고 있다"며 "사건당 4개월을 잡고 조사에 착수하는데 조사관 1명이 약 20건씩 사건을 맡고 있다.
최선을 다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 유족들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위원회는 특별법에 따라 오는 2021년 9월까지 활동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군납비리 내부고발' 전직 해군 소령…영화 '1급기밀' 모델 "깊이 고민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너는 그때 어떤 심정이었냐. 왜 죽었냐'면서 망자(亡者)들에게 말을 걸게 되더라고요. "
김영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2과장은 8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수십년 전 열악한 환경에서 선임에게 맞으며 군 생활을 한 장병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9월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출범한 위원회는 1년간 703건의 진상규명 신청을 받았고, 현재까지 13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619건은 조사가 진행 중이고, 71건은 각하·취하 등으로 종결됐다. 진상규명된 13건 중 9건을 조사2과에서 담당했다.
조사2과를 이끈 김 과장은 군납비리 내부고발자로 알려진 전 해군 소령이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 '1급 기밀'로 제작돼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멀게는 수십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진상규명 작업 결과물은 당시 군 당국이 은폐·축소하려 한 사건 경위를 뒤집기도 했다.
1969년 정모 일병이 수류탄 폭발로 숨진 사고에 대해 당시 군 당국은 '폭우로 유선 상태를 확인하려고 잠복호에 들렀다가 수류탄을 호기심에 만지다가 폭발해 오른발과 오른손 절단 및 심장 파편창으로 현장에서 사망하고, 경계병 2명에게 상해를 입힌 사고'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진상규명 결과 정 일병은 공무수행 중 벌어진 사고의 피해자였다. 김 과장은 "군 조사 기록에 '호기심에 수류탄을 만졌다'는 말이 나오는데 '호기심'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었다"며 "선임 두 명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곳에 후임병이 일부러 찾아가 호기심에 수류탄을 만지다 터뜨렸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보통 매장·화장 보고서에 사망 원인이 '군 복무 염증'으로 나와 있으면 축소·은폐된 사건인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세월이 오래 지난 사건의 경우 유족이 진상규명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기도 한다.
1980년 총기로 목숨을 끊은 김모 이병은 부대 내 가혹행위 등이 사망 이유로 밝혀졌지만, 모친은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인 지난 1월 작고했다.
김 과장은 "지난 39년간 김 이병 부모님은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군과 싸워 왔는데, 어머니는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를 못 보시고 지난 1월 세상을 뜨셨다"며 "이처럼 부모님이 안 계시면 유족 연금을 지급할 수가 없어 신속하게 해결해야 할 사건들이 많다"고 했다. 김 과장은 지난 1년간 실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전쟁 영웅을 국립묘지로 모실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숨진 박모 소위는 68년 만에 전사자로 인정됐다.
그는 강릉농고에서 배석장교(교련 교사)로 근무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보충장교령에 의해 소위로 소집됐다.
그해 9월 영천 전투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다친 뒤 군 병원에서 치료받다 소집해제됐고, 이듬해 4월 28세로 사망했다.
김 과장은 "군 당국은 박 소위가 사망 전 소집해제됐다는 이유로 전사자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당시 소집해제 명령서를 본인이나 가족에게 전달하거나 통보하지 않았다"며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장교를 전투 중 다쳤다는 이유로 소집해제하고 전사자로 인정하지 않는 건 국가가 참전용사를 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진상규명위 결론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국방부에 있다.
국방부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위원회 결정을 따라아 한다'는 규정에 따라 결론을 낼 것으로 보인다.
김 과장은 "군복무 중 사망한 7만9천여명 중 미순직자가 3만9천여명인데, 이 가운데 진정서가 접수된 건을 조사하고 있다"며 "사건당 4개월을 잡고 조사에 착수하는데 조사관 1명이 약 20건씩 사건을 맡고 있다.
최선을 다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 유족들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위원회는 특별법에 따라 오는 2021년 9월까지 활동할 예정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