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과 실험을 좇다…'이단아' 한트케의 문학 외길(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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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 '관객모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고정관념 깬 새 형식 창조 몰두
"정치적 이유로 오랫동안 노벨상 단골 후보만…밀로셰비치 옹호"
독일 문단의 이단아.
올해 몫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페터 한트케(77)를 따라다닌 수식어다. 그는 평생 문학 외길을 걸으며 파격과 실험 정신을 추구한 작가로 독창적 영역을 구축했다.
소설, 희곡, 방송극, 시 등 장르를 넘나들며 평생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고 21세기 들어 독일어권 작가 중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랫동안 꼽혔다.
노벨문학상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단골 후보로 거명됐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라고 할 정도였다.
한트케가 오랜 시간 단골 후보에 오르면서도 노벨상을 거머쥐지 못한 배경에는 정치적 이유가 적잖이 작용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는 '인종 청소'로 악명 높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 유럽 전체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었다는 것이다. 윤용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으나 한트케가 밀로셰비치 편을 들면서 유럽 정치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못 받았다"면서 "문학은 문학으로만 봐야 한다고 하나 정치인들은 그렇게 보기 어렵다"고 했다. 한트케의 파격과 실험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 바로 희곡 '관객모독'이다.
1966년 발표한 출세작이면서 우리나라에도 연극으로 소개돼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배우들이 객석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조롱하며 기존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깬다.
이런 이유로 '반(反)연극'으로 불릴 정도였다.
형식 파괴는 물론 기성 문단에 대한 불만과 공격성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언어를 비틀고 해체하는가 하면, 배우들이 대사를 제멋대로 띄어 읽거나 반복하도록 해 문법과 틀을 해체한다.
특히 극 말미에 관객에게 거침없이 욕설과 물세례를 퍼붓는 장면으로 세계적 화제가 됐다.
이런 '반골 기질' 때문에 그가 새롭게 발표하는 작품은 항상 논쟁의 소재가 됐다.
매번 고정 관념을 깨는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들고 독자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소망 없는 불행',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희곡 '카스파', 에세이 '어느 작가의 오후', 시 '내부 세계의 외부 세계의 내부 세계' 등이 있다.
몇몇 작품은 영화화했고 자신이 직접 연출을 맡은 작품도 있다.
빔 벤더스 감독과 함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도 썼다.
잘츠부르크 문학상, 오스트리아 국가상, 브레멘 문학상, 프란츠 카프카상, 실러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등 독일어권 저명한 문학상을 대거 휩쓸며 일찌감치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1942년 오스트리아 케른텐 주 그리펜에서 출생한 한트케는 유아 시절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등 성년이 되기까지 국경을 넘어 여러 곳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유랑의 삶을 살았다.
게다가 유년 시절 대부분을 척박한 시골에서 보내며 전쟁과 궁핍을 경험했고, 스물아홉 살 때 모친이 건강 악화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비관해 자살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그의 이단아 기질은 순탄치 않은 유소년과 젊은 시절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데뷔작은 1966년 출간된 소설 '말벌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독일어권 문학을 창조하자는 문인들의 모임 '47그룹'에서 활동하며 '독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47그룹'은 2차 대전에서의 전쟁 범죄 같은 현실을 미화하지 말고 사실대로 쓰자는 입장이었지만, 한트케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윤 교수는 "한트케는 '관객 모독'처럼 현실이 아니라 언어가 문학을 만든다고 주장하며 선풍을 일으켰다"면서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정치적 이유로 오랫동안 노벨상 단골 후보만…밀로셰비치 옹호"
독일 문단의 이단아.
올해 몫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페터 한트케(77)를 따라다닌 수식어다. 그는 평생 문학 외길을 걸으며 파격과 실험 정신을 추구한 작가로 독창적 영역을 구축했다.
소설, 희곡, 방송극, 시 등 장르를 넘나들며 평생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고 21세기 들어 독일어권 작가 중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랫동안 꼽혔다.
노벨문학상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단골 후보로 거명됐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라고 할 정도였다.
한트케가 오랜 시간 단골 후보에 오르면서도 노벨상을 거머쥐지 못한 배경에는 정치적 이유가 적잖이 작용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는 '인종 청소'로 악명 높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 유럽 전체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었다는 것이다. 윤용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으나 한트케가 밀로셰비치 편을 들면서 유럽 정치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못 받았다"면서 "문학은 문학으로만 봐야 한다고 하나 정치인들은 그렇게 보기 어렵다"고 했다. 한트케의 파격과 실험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 바로 희곡 '관객모독'이다.
1966년 발표한 출세작이면서 우리나라에도 연극으로 소개돼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배우들이 객석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조롱하며 기존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깬다.
이런 이유로 '반(反)연극'으로 불릴 정도였다.
형식 파괴는 물론 기성 문단에 대한 불만과 공격성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언어를 비틀고 해체하는가 하면, 배우들이 대사를 제멋대로 띄어 읽거나 반복하도록 해 문법과 틀을 해체한다.
특히 극 말미에 관객에게 거침없이 욕설과 물세례를 퍼붓는 장면으로 세계적 화제가 됐다.
이런 '반골 기질' 때문에 그가 새롭게 발표하는 작품은 항상 논쟁의 소재가 됐다.
매번 고정 관념을 깨는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들고 독자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소망 없는 불행',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희곡 '카스파', 에세이 '어느 작가의 오후', 시 '내부 세계의 외부 세계의 내부 세계' 등이 있다.
몇몇 작품은 영화화했고 자신이 직접 연출을 맡은 작품도 있다.
빔 벤더스 감독과 함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도 썼다.
잘츠부르크 문학상, 오스트리아 국가상, 브레멘 문학상, 프란츠 카프카상, 실러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등 독일어권 저명한 문학상을 대거 휩쓸며 일찌감치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1942년 오스트리아 케른텐 주 그리펜에서 출생한 한트케는 유아 시절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등 성년이 되기까지 국경을 넘어 여러 곳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유랑의 삶을 살았다.
게다가 유년 시절 대부분을 척박한 시골에서 보내며 전쟁과 궁핍을 경험했고, 스물아홉 살 때 모친이 건강 악화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비관해 자살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그의 이단아 기질은 순탄치 않은 유소년과 젊은 시절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데뷔작은 1966년 출간된 소설 '말벌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독일어권 문학을 창조하자는 문인들의 모임 '47그룹'에서 활동하며 '독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47그룹'은 2차 대전에서의 전쟁 범죄 같은 현실을 미화하지 말고 사실대로 쓰자는 입장이었지만, 한트케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윤 교수는 "한트케는 '관객 모독'처럼 현실이 아니라 언어가 문학을 만든다고 주장하며 선풍을 일으켰다"면서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