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全유라시아 연결된 개방성·험난한 장정 이겨낸 탐험정신이 '민족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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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인의 본성과 변성나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궁금증은 참지를 못한다. 그 때문에 고민에 빠질 정도였다. 도대체 나는 어떤 성격을 가졌을까? 내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한 ‘한민족’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을까?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요즘엔 더욱 천착할 수밖에 없는 주제다.
중국인들은 <삼국지> 동이전 등에서 ‘고구려인은 성질이 흉포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 좋아한다, 심지어 말투가 천하다’라고 전했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의식을 교란시키고 길들이기 위해 한민족의 본성을 작위적으로 규정하고 세뇌시켰다. 식민사관에 따르면 우리는 늘 사대적이었고, 당파성이 강했고, 주변부적인 존재였다.스스로는 ‘정이 철철 흘러넘치고, 한(恨)을 지닌 민족’이며 ‘판소리와 창·춤·동양화 등은 민족문화에 내재한 한을 승화시킨 예술’이라고 자찬하기도 한다. 조선 미학의 스승처럼 모셔지는 세키노 다다시와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한 ‘애상’ ‘비애의 미’ ‘원한’의 영향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고 부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인데도 우리 머릿속을 점령했다.
설사 맞는다 해도 그것은 조선시대의 ‘이상(異常)현상’이지, 전 시대에 일관된 문화이자 정서는 아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남녀 모두 수의(장례를 위해 고인에게 입히는 옷)를 만들어놓고 살며, 낙천적이고 당당했다. 춤사위는 자유롭고 호방했으며, 여백의 미와 정적인 미를 중시한 수묵화가 아니라 화려하고 동적인 채색화를 그렸다.‘은근과 끈기’라는 말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이 또한 언제부터인가 민족성으로 자리잡아버렸다. 식민지 상태와 동족상잔의 고난에서 막 벗어나 매일 허기와 싸워야 했던 시절에는 나름 의미있었지만, 역시 사실은 아니다. 우리 민족은 원래 급한 데다 ‘흥’과 ‘신기’가 충만하다는 사실은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지 않는가. ‘평화를 사랑한 민족’이라는 관념도 널리 퍼져 있다. 무려 1000회 가까이 침략을 당해왔어도 한 번도 침략한 적이 없다는 자랑인데, 피지배자의 서글픈 항변이고, 약자의 자기 확인으로 비춰지는 것은 웬일일까? 남들이 평가하듯 우리가 너그럽고 점잖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평화만을 사랑한 바보였을까?
우리가 배워왔고, 아직껏 느끼는 우리 문화와 민족성은 왠지 모르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자연환경론조차도 부정확한 사실에 근거하고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땅이 좁고 인구가 적은 소국이니까 대국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以小事大) 자기합리화까지 했다. 일본인들은 ‘반도적 성격론’을 들고 나와 고대부터 중국의, 남쪽에서는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고 가르쳤다(임나일본부설). 야나기 무네요시는 대륙의 무서운 북풍 때문에 조선은 고난의 역사가 됐다고 안타까운 말투로 우리를 규정했다.
이 주장들의 문제점은 많다. 사실이 아닌 경우도 많지만,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전체 역사가 아닌, 비교적 덜 긍정적인 조선시대와 어두운 일제강점기만으로 민족성을 만들어냈고 강요했다. 실제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소위 민족성에 해당하는 좋은 몇 가지 성격들을 갖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윤명철 저 <다시보는 우리민족> 참고)탐험정신
우선 민족성의 가장 큰 특성으로 ‘탐험정신’을 꼽는다. 탐험은 유인원을 인류로 변환시킨 동력이다. 또한 역사의 원동력임은 서양의 발전이 증명한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동아시아도 역동적인 유목문화와 해양문화, 숲문화, 농경문화들이 만나 탐험정신이 넘실대는 곳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우리 민족이 있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우리 땅을 목표로 광대한 유라시아 세계의 8개 이상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출발했다.사람들은 새 것을 좋아하는가 하면(네오 필리아), 동시에 두려워하는 속성도 있다(네오 포비아). 그런데 개인이 아닌 집단이 운명을 내맡긴 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신천지를 찾아간다는 것은 탐험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험난한 대장정의 도중에 일부는 질병과 고통, 전쟁과 죽음, 좌절감으로 실패했고 대다수는 중도에 멈췄다. 그래도 끝까지 여정을 성공시켜 이 터에 정착한 탐험가들은 한민족의 뿌리를 이뤘다. 그 후예들은 안주하지 않고 대륙과 해양으로 다시 진출했다.
이상 지향과 강한 자의식
우리에겐 ‘이상(理想)’을 지향하는 순수한 성격이 남달리 강했다. 우리가 살아온 동쪽의 끝(Far East)은 해가 떠오르고 문화의 씨앗이 움트는 터였다. 해는 빙하기 이후에 인간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고 햇빛은 밝음과 지혜를 상징했다. 그래서 이집트인, 인도인, 마야인, 투르크인들처럼 인류는 해를 숭배했지만 우리처럼 집요하게 추구하고 하늘을 숭모해온 민족은 드물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등의 나라 이름, 심지어 ‘한국’까지도 해와 밝음을 의미한다. 부여와 고구려의 초기 왕들은 태양을 의미하는 ‘해(解)’씨였다. 백제의 동명(東明)도, 신라의 박혁거세도 ‘밝음’을 뜻한다. 백두산, 태백산, 부여 같은 지명들도 해와 관련이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백제의 동명제 같은 의례는 하늘을 모시는 제천행사다. 하늘의 자손(天孫), 해와 달의 자식(日月之子), 천제(天帝)임을 자처했으니 항상 자의식이 강했다. 지나칠 때는 오만과 거드름으로 변성(變性)돼서 안타깝지만 말이다.
다양성과 개방성
우리 민족성은 한때는 교조적이고 쇄국적이었지만, 원래는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다양성이 풍부했다. 문화와 혈연, 언어, 신앙, 설화 등은 유라시아의 전 지역과 연결됐다. 이 때문에 다른 외모와 말을 존중했고 다른 문화와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했다. 더욱이 발전기에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해양, 심지어 일본 열도의 일부까지 문화공동체였으므로 당연히 개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교, 선교(풍류도),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서구 사상 등 많은 종교와 사상이 들어와 지금까지 큰 차별과 충돌 없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다.
고구려는 다양한 문화는 물론 국제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통일신라와 발해도 다양성과 개방정신이 약화되지 않았다. 고려는 더욱 왕성하게 오키나와(유구국), 인도, 아라비아 등과 무역했고 문화를 활발하게 교류했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중국 문화와 성리학자들의 관념에 오염되면서 폐쇄성을 띠게 됐다. 시대 변화와 국제 환경에 필요한 대응력을 상실한 끝에 식민지가 돼버렸다. 하지만 백성은 외국인에게 친절하고 서양문물을 기민하게 터득하는 영민한 사람들이라고 평가받았다.조화와 통일 정신
지금 상황들을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조화와 협력’이라는 세계관을 갖고 항상 통일을 지향하는 성정이 강했다. 흔히 우리는 당파성이 강하다고 자타가 말한다. 한 개인은 매우 똑똑한데 두세 사람이 모이면 갈등과 분열이 생긴다고 자조한다. 일본이 당쟁 등을 침소봉대해 생래적인 민족성인 것처럼 세뇌시켰고, 그 결과 지금은 내부 분열이 도를 넘었다.
우리 역사의 초창기에는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섞여 정치의 혼란, 사회의 혼란이 격화될 우려가 컸다. 그런데 우리는 동질성을 모색하고 문화 갈등과 격차를 해소하려 노력했다. 결국은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사상을 정립시켰다. 단군신화가 표방하는 ‘단계적인 변증법’ ‘3의 논리’ ‘홍익인간’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원(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인들은 정복한 여러 종족을 포용하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해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통일신라는 비록 외국의 힘을 빌려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했지만 화엄사상과 원효의 화쟁(和諍)사상 등이 빛을 발했다.
나도 어릴 때만 해도 온 동네를 내 집처럼 여기고 남의 일에 참견을 잘했다. 누구나 김치나 된장 같은 발효음식과 곰탕, 비빔밥처럼 섞는 음식을 좋아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한 민족’으로 남았고, 분열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타고난 성격 때문이다.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썼지만 한 시대의 문화나 민족성은 영원불변한 것도 아니고 일시에 만들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붕괴를 향해 질주하고 인간성은 재빠르게 오염되는 지금, 과학적으로 자기를 성찰하고 세계인들, 세계 문화들과 객관적으로 비교해야 한다. 그리고 변성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멋들어진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의 생존, 동아시아의 평화, 인류문명의 진보를 위해서라도.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