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장기성장여력 확충에 치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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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국면 돌파 위한지난달 발표된 내년 예산안을 보면 정부지출 증가율은 9.3%로, 2009년의 10.6% 이후 가장 높다. 최근에도 정부는 다양한 지출 계획을 발표하며 대대적인 확장정책을 예고하고 있다. 지금의 경제상황은 불황에 접어든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만큼 정부는 확장적 재정정책을 고려할 가능성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재정 여력이 있음을 언급하며 확장적 재정정책을 주문하고 있다.
단기 확장적 재정정책
국가채무 확 늘려
재정위기 부를 수도
눈앞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장기성장여력을 다져야
김소영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하지만 무리한 확장적 재정정책은 여러 우려를 자아낸다. 기준연도 변경으로 인한 국내총생산(GDP) 증가로 국가채무비율 40% 논란이 잠시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내년 예산안이 그대로 집행되면 2020년 국가채무비율은 39%대, 2023년엔 46%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실 국가채무비율 40%를 지켜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하지만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을 100% 이상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치와 비교하면서 재정여력이 충분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OECD 국가 중 상당수는 국가채무가 과다해 재정위기를 겪었다. 우리가 OECD 국가들과 비교하는 이유는 선진국의 좋은 점을 반영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선진국은 국가채무 관리에 실패했고, 재정위기까지 경험했다. 이런 국가들을 모범으로 삼는 것은 그들을 따라 재정위기로 뛰어들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OECD 국가 중 상당수는 보다 쉽게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기축통화국이고, 한국과 비슷한 비(非)기축통화국의 국가채무비율은 훨씬 낮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복지지출 비중은 다른 국가보다 훨씬 낮은 상태이므로 향후 복지지출이 증가하면 국가채무비율이 급증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정부의 경제 전망이 낙관적이기 때문에 세수를 과다 평가하고 지출을 과소 평가할 가능성도 크다. 당장 내년에 40%를 웃도는 등 국가채무비율이 예상보다 급등할 가능성이 있다.
세계은행도 지적했듯이 ‘공짜 점심은 없다(No free lunch)’.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리면 당장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투자와 장기 성장여력은 줄어들 수 있다. 누적된 정부 부채에 대한 이자 부담 탓에 조세를 늘리게 되면서 민간의 소비여력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향후 경기침체 시 재정을 사용할 수 있는 여력도 줄인다.물론 장기 성장여력 제고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부 지출도 있다. 현 예산안을 보면 그런 지출이 이전보다 늘어나기는 했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더욱이 단기 경기부양에 효과적이지 않은 지출도 상당 부분 발견된다.
최근 가계부채 급증이 한국 경제의 위험 요인으로 언급되고 있다. 가계부채가 많이 축적된 상황에서 국가부채까지 증가한다면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세계적 석학 카르멘 라인하트 교수와 케네스 로고프 교수의 저서 <이번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가부채의 급증은 금융위기 발생 직전에 나타나는 주요 현상 중 하나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한국 경제는 5%대 성장률을 기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성장률이 급락하자 2009년, 2010년 정부는 역대 최대 규모의 추가경정예산과 재정 지출을 단행했다. 그 결과 2010년에는 금융위기 직전보다 높은 6.5%의 성장률을 기록해 경제가 회복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다음해인 2011년부터 3% 내외의 저성장 늪에 빠지게 됐고, 한국 경제의 장기 성장여력이 크게 줄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은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단기 부양책으로는 경제 성장률을 장기적으로 올리기 어렵다. 대규모 단기 부양책에 가려 장기 성장여력이 급격히 줄었다는 사실을 몇 년 뒤에나 알게 된 경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2% 안팎의 저성장 국면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올해와 내년 대대적인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성장률이 잠깐 반등할지라도 이후 더 낮아지는 저성장 국면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1~2년이 아니라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1~2%대 성장률이 고착화되면 아무리 부양책을 써봐야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어렵다. 한국 경제의 장기 성장여력을 확충하는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