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몽골이 세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민간무역 번성, 新 지식인도 배출…조선을 열 신흥세력 잉태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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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0) 팍스 몽골리카 (하)1323년 남방산 향목(香木)과 2만 점 이상의 자기 및 28t의 동전을 싣고 중국 영 파를 떠나 일본으로 가던 200t 규모의 무역선이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 다. 1976년 우연히 발굴된 이 무역선은 대몽골 울루스의 질서에서 번성했던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전남 신안 보물선2만 점 이상의 자기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고려청자도 포함됐다. 고려 왕실만 그 번성한 동아시아 해상 교역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민간 상인도 참가했는데, 그들의 몫은 14세기 말까지 점점 커지는 추세였다.
14세기 전반 <노걸대(老乞大)>라는 어학 교습서에 의하면 고려 상인들은 모시와 인삼을 말에 싣고 육로로 요동을 거쳐 원의 대도로 갔다. 대도에는 그들의 친척이 있어서 물화를 판매했다. 상인들은 그 대금으로 산동의 제령부로 내려와 비단, 바늘, 화장품, 장신구 등의 고급 물화를 구입해 배편으로 귀환했다. 그들은 관인무역허가장을 지참했는데, 이외에 상인 자격이나 수출입 품목의 종류·수량에 특별한 제약이 있던 것 같지는 않다.
14세기 중후반 원명(元明) 교체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민간 무역은 더욱 번성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모시였다. 권세가들은 그들의 농장에 모시를 재배했으며, 주변 사원으로 수공업자와 노비를 모아 모시 천을 대량 직조했다. 고려 상인에 관한 <박통사(朴通事)>란 기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1만 필의 모시를 싣고 중국에 입항하는 고려 상선이 있었다. 고려왕조는 상선이 직접 중국으로 출항하는 것을 금했다. 그 금령이 14세기 중후반에 사실상 해제된 상태였다. 민간 무역의 번성으로 대도의 외항인 통주 관내 완평현에 고려장(高麗莊)이란 마을이 생겨났다.원의 관리가 고려에 부임
원 제국으로부터의 충격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원의 고위 관리가 고려에 부임했으며, 제 개혁과 새로운 정치를 주도했다. 고려 청년들이 원에 진출해 과거에 급제하고 원의 관리로 출세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신유학을 신봉하는 지식인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했다. 1289년 안향(1243∼1306)이 원에서 구한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들고 돌아왔다. 뒤이어 권보(1262∼1346)가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했다.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이제현(1287∼1367)은 원의 수도 연경에서 6년이나 체류했다. 그는 충선왕이 지은 만권당에 머물면서 원의 유명한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세 차례나 중국 서역과 강남을 여행하면서 세상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뒤이은 이곡(1298∼1351)과 그의 아들 이색(1328∼1396)의 시대에 이르면 고려 지식인의 역사관은 이전 시대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조선왕조와 팍스 몽골리카1333년 원의 과거에 급제한 이곡은 이듬해 원의 관리로 금의환향했다. 그때 송경이란 원의 관리가 시 한 수를 헌정했는데 “연개소문 후에 무사(武事)가 줄어들고 책구루(溝婁) 아래에 글 읽는 소리 이어졌네”라고 하면서 고려의 문풍을 칭찬했다. 책구루는 고구려와 당(唐) 사이 놓인 성을 말한다. 이색은 이 구절을 “기자(箕子)가 끼친 풍교(風敎) 어언 2000년에 책구루 아래에 글 읽는 소리 이어졌네”로 수정해 이곡의 문집에 수록했다. 그렇게 고려는 더 이상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고려 지식인의 정신세계는 삼한일통의 무위(武威)가 아니라 기자의 풍교를 숭상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1392년 이뤄진 조선왕조 개창은 그 이전 150년간 한반도에 가해진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작용을 배제하고선 설명하기 힘든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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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제국으로부터의 충격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원의 고위 관리가 고려에 부임했으며, 제도 개혁과 새로운 정치를 주도했다. 고려 청년들이 원에 진출해 과거에 급제하고 원의 관리로 출세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신유학을 신봉하는 지식인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