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더 내고 더 받나…정부, 돌연 "단일案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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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방치' 비판에 입장 선회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21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민연금 개혁안과 관련,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제시한 세 가지 안 중 현행 유지 안을 제외하고 두 가지 안을 살펴 (정부) 단일안을 마련하는 것을 내부에서 토론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일 같은 자리에서 밝힌 “정부가 단일안을 제시하기 힘들어 정치권(국회)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입장을 19일 만에 뒤집은 것이다. 이는 “정부가 정치적 부담을 지기 싫어 연금개혁을 방치하고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보험료율 12%·소득대체율 45%
'경사노위 다수案' 선택 유력
정부는 경사노위가 제시한 다수안을 정부 단일안으로 정해 늦어도 다음달 초 국회에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급여의 9%(근로자 부담 4.5%)를 부과하는 보험료율은 2031년까지 12%로 단계적으로 높이고, 2028년 40%를 목표로 떨어지고 있는 소득대체율(현재 44.5%)을 45%로 유지하는 안이다. ‘더 내고 더 받는’ 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2057년으로 예상되는 연금 고갈 시점이 6년 늦춰진다. 하지만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국회 통과 여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국민연금 개편 논의는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인 2017년 12월 시작됐지만, 보험료율 인상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면서 2018년 12월 사회적 합의기구인 경사노위로 안이 넘어갔다. 경사노위에서도 단일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3개의 복수안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
'月 5만원 더 내는' 국민연금 개혁안
총선 앞둔 국회 통과가 관건
지난 2일 국정감사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 개혁과 관련해 “정부가 단일안을 제시하기 힘들다”며 “정치권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불과 19일 만인 21일엔 “정부가 단일안을 만드는 것을 내부에서 토론하고 있다”고 180도 달라진 입장을 밝혔다. 관가에서는 “박 장관의 발언 이후 ‘국민연금 개혁 문제를 국회에 떠넘기고 면피하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자 정부가 결국 직접 부담을 안고 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정부가 보험료율을 12%까지 높이는 방안을 단일안으로 유력하게 검토함에 따라 실제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질지도 관심이다. 2000년대 들어 소득대체율이 두 차례에 걸쳐 낮아지는 동안 보험료율은 1999년부터 9%로 동결돼 왔다.결국 연금개혁 부담 총대 멘 정부
정부는 2017년 12월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를 설립해 제도 개편 논의에 뛰어들었다. 현재 구조로는 국민연금이 2057년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논의를 더 미룰 수 없다는 결론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실제 개편 과정은 소극적이었다. 지난해 8월 소득대체율을 유지하면서 보험료율을 13%까지 올리는 안이 국민의 반대에 부딪히자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 전면 재검토를 지시한 것이 단적인 예다. 올해 8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다수안을 비롯해 개편안 세 개가 나온 이후에도 정부는 “경사노위 결과를 토대로 국회가 논의해달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정부가 이 같은 입장을 바꾸고 직접 총대를 메기로 한 것은 청와대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부는 경사노위 다수안을 단일안으로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소득대체율을 40%에서 45%로 높이고, 보험료율은 9%에서 12%로 올리는 내용이다. 소득대체율은 2008년 50%에서 매년 0.5%포인트씩 떨어져 2028년 40%로 낮아질 계획이다. 정부 개편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올해 44.5%인 소득대체율은 내년 45.0%로 0.5%포인트 올라간다. 보험료율은 2021년 10%로 높아진 뒤 2026년 11%, 2031년 12%로 5년마다 1%포인트씩 인상된다.
이에 따라 월 소득 350만원인 국민연금 가입자가 30년간 가입했을 때 받는 연금은 월 90만원에서 101만3000원으로 11만3000원 인상될 전망이다. 대신 월 보험료는 2031년부터 21만원을 내야 한다. 현행 15만7500원보다 5만2500원을 더 내는 것이다.‘더 내고 더 받는’ 방향 전환이 안이 실행되면 국민연금 고갈시점은 2063년으로 6년 늦춰진다. 현행 유지안, 소득대체율을 유지하며 보험료율만 1% 인상하는 안 등 경사노위가 내놓은 다른 안들과 비교하면 고갈시점을 가장 오래 늦추는 효과가 있다.
전문가들은 “‘더 내고 덜 받는’ 쪽으로 변해온 국민연금 개편이 ‘더 내고 더 받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방향 전환을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연금제도 개편이 기금 안정성에만 주안점을 뒀는데 이번 개편 논의에서는 노후소득 보장 기능도 강조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보험료율을 더 인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연금 전문가는 “소득대체율 45%를 유지하면서 기금 고갈 걱정을 없애려면 보험료율을 14~15%까지 인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단일안을 내기로 함에 따라 국회 논의는 빨라질 전망이다. 여러 안이 올라왔을 때는 각각의 적정성을 정치권이 새로 검토해야 하지만, 이제는 단일안을 통과시킬지 여부만 결정하면 된다. 내년 4월 총선으로 국회가 새로 구성되더라도 정부안을 기준으로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기반도 확보했다.다만 국정 지지율 하락을 겪고 있는 청와대와 여당이 얼마나 힘있게 개편안을 밀어붙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연금 개혁은 대부분 집권 초기에 추진돼 왔다. 김영삼 정부는 1년차에 1차 개혁을 했고 김대중 정부는 집권 3개월, 노무현 정부는 집권 8개월 만에 국민연금 개편안을 정부 안으로 제출했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 1년 만에 공무원연금 개편안을 내놨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